지난 21일 중국 외교의 컨트롤타워인 양제츠 중국 공산당 외교담당 국무위원이 부산을 방문해 한국의 카운터파트너인 서훈 국가안보실장을 만났다. 이는 2014년 한중정상회담을 계기로 국가안보실장과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사이에 구축된 고위전략대화의 일환이기도 하다. 양 위원의 방한이 특히 주목받은 것은 미중 양국의 치열한 기싸움 한가운데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중국을 미국의 가치에 도전하는 국가로 간주했고 심지어 시진핑 주석을 당 총서기로 호명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며 중국도 여기서 밀리면 더 밀린다고 보고 배수의 진을 친 상황이다.
중국은 미중 사이에서 전략 선택의 어려움을 겪는 국가를 상대로 ‘클라우드(雲)외교’와 방역 거버넌스를 과시하기 위한 대면 외교를 동시에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 대상을 싱가포르와 한국으로 삼은 것도 이러한 심모원려의 일환이다. 여기에 미국의 방역실패와 대비되는 중국 거버넌스를 부각하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번 방문은 형식적으로는 오래 전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이 초청한 것이지만 시기적으로 한중수교 28주년 즈음을 택한 것은 중국의 방문 의지가 그만큼 강하고 중국이 챙겨야 할 의제가 그만큼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이번 회담에 대해 양국 모두 좋은 분위기에서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했다고 평가했지만 자국 언론에 각각 브리핑한 내용을 보면 강조점과 온도 차이도 있다.
한국은 미중 전략경쟁에 깊게 연루되지 않기 위해 미중 간 공영과 우호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나 중국은 상호존중, 국제적 공평과 정의, 협력공영을 강조했다. 이것은 양 위원이 직전 싱가포르 방문 시에도 밝힌 ‘신형국제관계’의 주요 내용으로 미국의 ‘거친 외교’에 대한 불만을 에둘러 밝힌 것이다. 둘째, 지역협력에서도 한국은 신북방·신남방정책과 ‘일대일로’의 연계협력 시범사업 발굴을 강조했으나 중국은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과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체결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이것은 산업사슬과 공급사슬의 보호 등 미국의 디커플링에 대한 중국 차원의 지역전략으로 볼 수 있다. 셋째, 한국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진전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강조하면서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밝혔지만 중국은 관련 국가와 함께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건설적 역할을 하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중국 외교부가 “지난 몇 년 북한은 긴장 완화와 비핵화에서 적지 않은 적극적 조치를 취했으나 유감스럽게도 미국의 실질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고 보고 미국 책임론을 강조한 연장선에 있다. 다만 중국은 한반도 문제가 미중 갈등 전선의 확대로 이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이 먼저 움직일 경우 중국이 지원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원래 시 주석은 올봄 일본과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방역 문제, 홍콩 문제에 대한 태도 등으로 중일 관계에 이상 기류가 나타나면서 시 주석이 한국을 최우선으로 방문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시 주석의 단독 한국 방문은 한미관계의 창과 거울이라는 점에서 부담과 기회 요인이 동시에 있다. 안정적 북중관계를 활용한 한반도 비핵화와 남북관계 발전에 대한 중국의 건설적 역할, 중국의 공급체인에서 한국 기업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조치, 사드 보복 조치로 인한 롯데 등 피해기업의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성과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 사회에 넓게 퍼진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로잡고 한중 간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고도화할 수 있을 것이다. 대나무가 곧게 자라는 이유는 계기마다 매듭을 짓고 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