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가 연간 40억달러를 웃도는 대한(對韓) 무역수지 적자를 이유로 한·터키 자유무역협정(FTA) 파기를 고려하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경기부양의 필요성이 커졌지만 보유외환이 넉넉지 않은 탓에 달러 유출을 막아 급한 불을 끄겠다는 겁니다. ‘헬리콥터 머니’를 퍼부어 대처하는 선진국과 달리 개도국은 위기 극복 수단이 마땅치 않은 터라 이 같은 자금통제가 인도 등 다른 개도국에서도 나타날지 우려됩니다.
26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터키는 최근 통상당국 협상에서 한·터키 FTA의 전면 재검토를 요청했습니다. FTA가 한국 측에 유리하게 설계돼 협상 발효 이후 매년 40억달러 이상의 외환이 한국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올해 초에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FTA를 파기하는 방안까지 고려하겠다며 통상당국을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단순히 투자를 더 유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몽니를 부리는 수준이 아닌 것 같다”며 “터키의 외환보유액이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상황이라 협상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FTA 파기까지) 진지하게 검토하는 분위기”라고 말했습니다.
한국과 FTA 격인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을 맺고 있는 인도 역시 협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협정이 불공정한 탓에 한국이 매년 100억달러 수준의 무역흑자를 보고 있다는 게 골자입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터키만큼은 아니지만 인도도 양자협정에 대한 불만이 상당하다”며 “한국에 대한 무역수지 적자 규모가 중국 다음 가는 수준이라 타깃이 된 것 같다”고 우려했습니다.
이들 국가가 양자협정을 두고 이 정도로 압박 수위를 높인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수치에서 드러나듯 FTA로 양국이 모두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대외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터키 FTA 발효 후(2013∼2017년) 대(對)터키 수입은 발효 전(2008∼2012년)보다 연평균 1억7,400만달러 증가했습니다. 터키와 인도 등은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를 문제 삼고 있으나 이 역시 국내 기업의 진출로 현지 투자와 중간재 수출이 늘어난 점을 고려하면 지나친 문제 제기라고 당국은 보고 있습니다. 실제 한국의 터키 직접투자는 한·터키 FTA 발효 전 연 1억3,000만달러에서 발효 후 연 2억7,000만달러로 두 배 넘게 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TA 파기까지 거론하며 무역적자 해소를 위한 강도 높은 압박이 이어지는 것은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기 악화 속도가 가팔라졌기 때문으로 분석됩니다. 우선 터키를 보면, 리라화 가치는 올 들어 달러 대비 20% 이상 떨어졌습니다. 중앙은행이 리라를 사들이며 방어에 나섰으나 성과는 못 내고 외환보유액만 축냈습니다. 실제 터키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은 9월 453억달러로 지난 1월(780억달러)보다 42% 급감했습니다. 설상가상 주요 외화수입원인 관광업마저 코로나19로 막혔습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만큼 한국을 포함한 무역수지 흑자 국가에 무역장벽을 쌓아 외화 유출을 막으려는 게 터키의 속내입니다. 인도가 최근 양자협정을 문제 삼는 동시에 상계관세 부과 품목을 넓혀가는 것도 국내에서 위기 극복을 위한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는 미국·유럽과 달리 개발도상국 정부로서는 마땅한 수단이 없다”며 “상대국을 압박해 당장 필요한 실탄을 마련하는 한편 위기의 원인을 타국으로 돌리려는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문제는 이 같은 요구를 달랠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상대국에 투자를 확대해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방안 등이 거론되나 글로벌 경기 침체 상황에서 신규 투자 수요를 발굴하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되레 무역수지 적자를 키울 수 있습니다. 김흥종 대외경제연구원장은 “인도가 무역적자를 얘기하지만 이 중 상당 부분은 인도 측 요구에 맞춰 현대자동차를 포함한 국내 기업이 현지에 진출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며 “상대를 달래기 위해 투자를 늘리면 현지 공장으로 중간재 수출이 늘어나 적자 규모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 더해 다른 개도국들도 보호무역조치를 확대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 미국을 포함한 주요 선진국들이 시중에 유동성을 대거 공급하면서 자국 통화 가치를 끌어내리는 가운데 신흥국의 수출 경쟁력이 떨어져 경제위기가 심화할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안 교수는 “인도처럼 상대적으로 힘이 센 개도국이 아니면 쉽사리 보호무역 카드를 꺼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개도국들의 목소리를 그나마 반영하던 세계무역기구(WTO)마저 기능이 마비되면서 브라질·이집트·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불만이 커지고 있어 우려스럽다”고 했습니다.
/세종=김우보기자 ub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