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꽃의 꽃잎은 아주 연하고 부드럽다. 달빛처럼. 나팔꽃이나 호박꽃같이 부드러운 꽃잎을 가진 꽃들은 연한 빛 속에서만 핀다. 강한 햇살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람의 살이나 흙, 흙의 다른 모습인 풀과 나무, 물과 물풀, 이끼 오른 바윗돌 모두 그 자체의 향기나 소리가 부드러운 것이 아닐까? 자연은 쇠붙이와 기계, 권력과 거대자본에 쉽게 부서지고 찢겨나가 견뎌내질 못한다. 지금 제주 섬의 자연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듯 보인다.’
제주 화가 강요배의 산문집 ‘풍경의 깊이’에 나오는 말이다. 어디 제주의 섬만 두려움에 떨고 있을까. 크게는 한반도, 더 크게는 지구가 떨고 있다. 달맞이꽃잎 같은 대지에 쇠붙이가 못살게 굴기 때문이다. 연한 달빛 아래 함초롬히 핀 달맞이꽃, 그 자체가 은은한 울림이다. 화려한 장미보다 부드러운 달맞이꽃이 주는 정겨운 속삭임, 그 자체가 감동이다. 달빛이 키운 달맞이꽃. 장독대 위에 정화수 올려놓고 두 손 모으던 옛 여인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달빛이 묻어 있으리라.
필자는 경주를 사랑했고 또 거기서 일을 한 적도 있다. 삼국을 통일시켰던 신라의 고도는 가르침을 많이 내려준다. 경주를 다니다 보면 어떤 특징 같은 것이 떠오른다. 왕궁의 이름은 월성(月城)이고, 안압지라고 불렸던 별궁의 이름은 월지(月池)이고, 근래 복원한 원효대사의 일화가 있는 다리 이름은 월정교(月精橋)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달이다. 태양이 아니고 달이라니, 특기할 사항이 아닌가. 석굴암이 있는 산은 토함산이다. 구름을 삼키고 뱉을 정도로 높은 산이다. 거기서 동해 쪽의 산 이름은 함월산이다. 함월(含月)은 달을 머금고 있다는 뜻이다. 동해 일출을 기리는 일출산이 아니고 왜 함월산일까. 달의 신라. 통일신라는 달빛을 먹고 통일 한반도의 정기를 일으켜 세웠는가 보다.
조선시대 문예부흥기에 유행했던 백자대호가 있다. 근래 달항아리라고 불리는 커다란 항아리를 일컫는다. 정말 보름달을 닮은 품이 넉넉한 원형이다. 얼마나 큰지 도예가는 상하 두 쪽으로 나누어 빚은 다음 합쳐서 하나로 만들었다. 둘이 합쳐 커다란 하나가 되는 것. 그것도 빼어난 아름다움과 더불어 용기로서 씀씀이가 아주 좋은 것. 달항아리는 조선의 마음과 같다. 넉넉한 품. 우리 시대에 절실한 마음가짐이다. 각박한 세파에 보름달처럼 포근한 인정이 그립다.
최근 영호남 미술교류전이 있었다. 전시명은 ‘달빛동맹’. 멋지다. 광주의 빛고을과 대구의 달구벌에서 한 글자씩 따와 ‘달빛’을 만들었겠지만 통일신라의 달을 연상시켜 필자는 흐뭇했다.
또다시 한가위 보름달이 떠오른다. 코로나 난국에도 보름달은 떠오른다. 우리 모두 품이 큰 달항아리 하나씩 가슴에 안고 한가위 보름달을 맞이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