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폭풍. 그렇다. 겉은 조용한 듯한데 속은 용광로처럼 뜨겁다. 폭풍은 폭풍이되, 남에게 피해를 주기보다 감동을 안겨준다. 우향 박래현(1920~1976)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의 분위기이다. 우향 예술세계가 이렇듯 위대했던가. 질곡의 인생과 다채로운 작품, 바로 우향 예술의 실체이다. 우향은 식민지 시절 일본유학을 통해 일본화를 수학했다. 고운 색깔의 미인도처럼 생동감과 현장이 없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우향의 작품은 대담할 정도로 새로워졌다. 1956년에는 ‘이른 아침’이나 ‘노점’과 같은 대작으로 국전 같은 공모전에서 최고상을 휩쓸었다. 시장의 여인들을 그린 신선한 화풍이었다. 지필묵의 새로운 개척이었다. 이어 ‘생명의 띠’ 계열의 추상작업이나 뉴욕에서의 판화 제작 등 실험정신은 계속 이어졌다. 덕수궁 전시 ‘탄생 100주년 기념: 박래현, 삼중통역자’는 우향의 진면목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왜 삼중통역자인가. 우향의 일생일대 모험, 바로 운보 김기창(1913~2001)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이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일본유학까지 다녀온 신여성이 가난하고 학벌 없고 청각장애까지 있는 젊은 화가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화가 우향은 운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고 그래서 삼중통역자가 되어야 했다. 우선 듣지 못하는 운보에게 언어를 가르쳤다. 해외여행을 하게 되면 영어를 한국어로 또 구화(口話)로 통역했다. 운보와 우향은 오랫동안 부부전을 통해 연구결과를 발표했고, 평생 동반자로 예술적 성취를 공유했다.
1985년 호암갤러리(삼성미술관 리움 전신)에서 우향 10주기 회고전을 개최했다. 그 전시의 기획업무를 맡았던 나는 운보 김기창 화백의 도움을 받았다. 처음에는 필담으로 의사소통했지만 친해지고 나니 종이가 필요 없었다. 나는 그의 떠듬거리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는 나의 입모습만 보고도 말을 이해했다. 운보 말년의 추억, 공개하기 어려운 사생활 부분 등, 나에게 운보 추억은 많고도 많다. 당시 운보 화백은 우향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운보에게 있어 우향은 ‘비의 마을(雨鄕)’ 그 자체였다. 항상 촉촉하고 포근한 집이었다. 건조하고 각박한 사회에서의 오아시스였다.
덕수궁 전시에서 나는 우향 예술의 위대함을 실감하고 스스로 놀랬다. 20세기 최고 정점에서 우뚝 서 있는 한국의 여성미술가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우향의 독자적 화풍, 섬세한 관찰력과 대담한 표현력 그리고 그 속에 스며있는 치밀한 구성과 역동적인 색감과 선(線)의 맛, 우향 예술의 내밀한 언어는 생생하게 살아 우리들 가슴을 흔들고 있다. 탄생 100주년 기념 박래현 전시, 지금 여기 우리들 곁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