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인 지난 1897년 완공된 서울 독립문의 현판은 우리 역사상 최악의 매국노로 꼽히는 이완용이 썼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는 독립협회 초대 위원장이었고 독립문 건립에 거액의 사비까지 내놓았다. 이런 그가 불과 7년 뒤 을사늑약을 주도하며 나라를 팔아먹었다.
이완용이 평생 권력을 좇아 수구와 진보를 오가면서 친미·친러·친일로 배를 갈아탄 기회주의자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이율배반적인 행보에 이해되는 구석도 있다. 생존이라는 인간의 강력한 욕망 앞에 역사적 대의란 얼마나 허약한지도 새삼 느끼게 된다. 더구나 조선왕조 자체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킬 의지가 없었다. 어쨌거나 젊은 시절 근대화 개혁의 기수이던 이완용은 희대의 망국신(亡國臣)으로 남았다.
흔히 조선의 3대 간신으로 꼽히는 임사홍도 한때 의기 충만한 관료였다. 권신 한명회 탄핵을 주장했고 성종에게 직언할 정도로 강직했다. 금주령을 어긴 재상을 벌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다 기득권 세력에 ‘미운털’이 박혀 12년간이나 유배 생활을 하더니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자 채홍사(採紅使)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그가 갑자사화를 주도해 사대부들을 죽이는 데 앞장섰는지는 아직 논란이 있다. 다만 성종은 물론 연산군에게도 충신이었지만 역사적 간신으로 남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한 인간에 대한 평가란 어떤 길을 걸었느냐가 아니라 마지막 순간 어느 길에 머물렀느냐에 달려 있는 모양이다.
중종 때 조광조는 이상주의적 개혁파였다. 그는 훈구파 세력의 특권을 없애는 여러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불교와 무속신앙 등에 대한 사상적 억압은 그들 사림만을 위한 개혁에 불과했다. 특히 요순시대의 도학정치에 빠져 조선 초기의 부국강병 정책을 패도정치로 매도하면서 임진왜란 준비 부족의 단초를 제공했다. 또 과거제를 폐지하고 도입한 현량과는 훗날 사림끼리 관직을 나눠 먹는 음서제로 전락했다.
요즘 586 집단의 부패를 보노라면 역사는 반복되는 듯싶다. 세월 앞에 한 세대의 타락이나 시대정신의 몰락이란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권력을 잡으니 한때 뜨거웠던 심장은 차갑게 식은 반면 입은 요설로 가득 차고 위장은 탐욕스러워졌다. 조국·윤미향·추미애 등 일련의 사태에서 자기반성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공정과 정의가 아닌 정략적 차원에서 문제를 풀다 보니 여러 비판은 민주화운동 시절의 조직보위론에 기대어 적폐 세력의 반격으로 몰아붙인다.
소득주도성장·부동산 등 정책 실패에 대해서도 도덕적 정당성을 강조할 뿐 결과는 책임지지 않는다. 또 끼리끼리 얽혀 기득권의 대물림에 열중하면서도 여전히 진보인 척한다. 이 와중에 나라는 둘로 쪼개져 서로 낙인찍기에 바쁘다. 갈등 관리의 최종 책임자여야 할 대통령은 특정 진영의 대리인처럼 행동한다.
그나마 지금처럼 극단적인 대립을 거듭하다가는 나라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 역설적인 희망이랄까. 다음 정권을 누가 잡든 국민통합이 최우선 목표가 될 것이다. 특히 산업화·민주화라는 구시대적 대립 구도에 물들지 않은 20대 미래세대가 성장하고 있다는 게 희망이다. 이들은 그 실체적 내용이 무엇이건 ‘정의’와 ‘공정’을 가장 중시하는 세대다. 진영의 포로가 되지 않고 현실 정책에 따라 수시로 지지세력을 바꾼다. 이들은 가부장제에서 벗어나 진보 어젠다인 페미니즘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세대다. 정치적으로 불리하면 오히려 성폭력 피해자를 공격하는 586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달님 영창’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나라’ ‘땅개’ 등 부적절한 표현을 사용한 국민의힘 일부 청년 정치인들에게 기성세대가 조금 너그러웠으면 좋겠다. 잘못한 게 분명하지만 이런 대립구도를 부추기고 실수를 거르는 시스템을 만들지 못한 것도 기성세대다. ‘대리 게임’ 물의를 빚은 류호정 정의당 의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의 말대로 “젊은이들 데려다가 앞세워 쇼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더불어민주당에도 박성민 최고위원과 같은 20대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 일단 숫자가 많아져야 옥석도 가려진다. 이들이 선의의 경쟁을 벌일 때 미래 지도자와 우리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choihu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