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맨투맨 스웻 셔츠에 워싱 처리된 방수 소재 트랙팬츠, 블랙 아이더 어글리 슈즈로 시크한 멋을 뿜어낸 40대 초반 꽃중년의 모습이었다. 2003년 토종 아웃도어 K2코리아의 경영을 맡아 국내 톱 클래스 패션 회사로 키워낸 정영훈(사진) 회장. 그가 젊어졌다. 올 가을부터 새로 선보인 K2코리아의 신규 브랜드 스트리트 패션 ‘NSAD’를 무심히 걸쳤을 뿐인데 족히 10살은 영해 보였다.
성수동 시대를 접고 2019년 강남구 자곡동 시대를 연 정 회장을 신사옥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1,000억원 규모를 투자한 흙회색 10층 짜리 대형 건물 10층에 둥지를 튼 집무실은 통유리를 통해 푸른 숲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 일주일에 2~3번씩 산을 탄다는 그가 이 곳을 선택한 이유다.
2000년 420억원의 매출로 시작한 K2코리아는 2014년 1조원을 처음 돌파 후 지난해 극심한 불경기에도 9,782억원을 기록, 국내 패션업계의 큰 버팀목이 됐다. 상반기 코로나19로 아웃도어 패션이 40% 이상 매출이 곤두박질 칠 때 아웃도어 브랜드 중 가장 잘 버틴 곳도 K2코리아다. 특히 브랜드 K2의 경우 코로나와 경기 침체에도 불구 전년 대비 5% 성장한 1,400억을 기록했다. 그 이유를 정 회장은 “스포츠 브랜드는 무조건 기능이었다. 결국 좌표를 잘 찍은 브랜드만 살아 남을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분석한다.
“정보도 많고 브랜드도 많은 브랜드 홍수 시대입니다. 모든 브랜드를 입어 보기도 신어 보기도 어렵죠. 결국 브랜드를 ‘찍고’ 오는 경향이 강화될 겁니다. 즉 이제는 정확한 ‘좌표 브랜드’가 되어야 합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확실한, 포지셔닝이 확실한 브랜드만 생존할 수 있겠죠.” 코로나19라는 엄혹한 상황을 거치며 그가 확인한 아웃도어 브랜드의 생존 전략이다.
실제 아웃도어 패션이 산에서 도심으로 내려오는 동안에도 K2는 “아웃도어는, 스포츠는 무조건 기능”이라며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고수했다. 그 사이 삼성물산 패션은 ‘빈폴아웃도어’를 포기했고, 디스커버리와 내셔날지오그래픽은 아웃도어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사실상 캐주얼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갈아 탄 상태다. 그러다 다시 코로나19가 닥치며 ‘아재 취미’였던 등산이 20~30대 젊은 여성들로 옮겨 붙으며 다시 아웃도어 의류가 주목받고 있다.
정 회장은 “K2코리아의 무기는 독보적인 기술과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라인업(포트폴리오)”이라고 꼽는다. “한국의 4계절을 골고루 누릴 수 있는 스포츠는 등산, 자전거, 런닝, 골프 잖아요. 우리는 K2·아이더(등산·아웃도어), 다이나핏(자전거·런닝·요가 등 도심 스포츠), 골프계 메가 브랜드 와이드앵글 등 한국에 적합한 포트폴리오를 모두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와이드앵글은 코로나19 수혜 브랜드다. 그는 “요즘 ‘명랑 골프’가 트렌드 아니냐”며 “유쾌하고 영하고 유니크한 브랜드의 콘셉트가 잘 맞아 떨어졌다”고 귀띔했다.
정 회장은 가을 시즌 10~20대 젊은 감성을 공략하는 고감도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NSAD’로 또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No strings attached. ‘얽매이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자동차 창고와 공구를 모티브로 한 테크 감성으로 엣지와 디테일을 보다 강조했다. MZ세대가 선호하는 ‘어콜드월’이나 ‘스톤헨지’의 느낌이 사뭇난다. “젊은 층이 스트리트 패션을 왜 입을까 의아했었죠. 시도해 보니 편하더군요. 옷으로부터 몸, 곧 정신이 해방되니 사고가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어요. 진정 영혼이 지향하는 바를 추구할 수 있게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브랜드 K2는 또 독자 개발한 ‘씬 에어(thin air)’ 소재의 깃털처럼 가벼운 패딩으로 올 겨울 출격 채비를 마쳤다. 프리미엄 이태리 패딩 ‘에르노’ 의 한국판 같은 느낌이다. 정 회장은 “짧게 왔다 가는 트렌드에 부화뇌동하면 안된다”며 “기술이나 디자인면에서 정확한 좌표에 근거한 브랜딩을 통해 지금의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심희정 라이프스타일 전문기자 yvett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