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5년 취임한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일찌감치 리튬이온배터리가 가진 가능성에 주목했다. 본격적으로 개발에 나섰지만 당시 세계 시장을 선도했던 일본 업체에 비해 기술력이 떨어져 적자만 쌓여갔다. 급기야 2001년 LG화학 최고경영진들은 배터리 사업을 접자고 구 회장에게 건의했다. 이에 구 회장은 “포기하지 말고 길게 봐야 한다”며 “끈기를 갖고 투자와 연구개발에 더 집중하라”고 지시했다.
2005년에도 배터리 사업에서 2,000억원의 적자를 봤지만 구 회장은 “끈질기게 하다 보면 꼭 성공할 날이 올 것”이라며 직원들을 격려했다. 결국 LG화학의 배터리 사업은 개발에 착수한 지 25년 만인 올해 2·4분기 사상 최대 실적으로 흑자전환에 성공하며 구 회장의 ‘뚝심’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삼성의 반도체 신화도 대주주 경영체제가 빛을 본 경우다. 1990년대 초반 반도체 불황이 닥쳤을 때 전문경영인 중심의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투자를 줄인 반면 삼성전자는 이건희 회장 주도로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일본 업체들을 추월해 1993년부터 27년째 글로벌 D램 시장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품이자 미래 먹을거리로 꼽히는 반도체와 전기차배터리는 모두 오너 경영인의 결단과 뚝심으로 탄생한 제품들이다. 단기 성과에 치중하는 전문경영인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성과들이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대주주(오너) 경영을 ‘적폐’로 규정하며 소수주주가 주인이 되는 기업 지배구조를 밀어붙이려 하고 있다. 정부는 올 8월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며 “대주주의 전횡을 방지하고 소수주주의 권익을 보호하는 등 기업의 불투명한 의사결정 구조를 개선하겠다”고 분명히 했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상법 개정안은 감사위원을 이사와 분리해 선출하고 이때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지분을 합산해 3%를 초과하는 주식에 대해 의결권을 제한하도록 했다. 경영계는 대주주의 경영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며 반대하고 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에는 ‘일감 몰아주기’ 등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를 막기 위해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규제 대상인 총수 일가의 지분 기준을 기존 상장사 30%, 비상장사 20%에서 20%로 일원화하고 이들이 지분을 50% 초과 보유한 자회사도 규제 대상에 포함하도록 했다.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다중대표소송제 역시 대주주의 사익 추구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도입한다는 방침이다.
이처럼 정부는 대주주 경영에 족쇄를 채우는 법안들을 몰아붙이고 있지만 이 같은 주장은 논리와 근거가 빈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독일의 밀레, 미국의 포드, 프랑스의 미쉐린, 스웨덴의 발렌베리 등 100년 넘게 대주주 중심의 경영체제를 이어오고 있는 세계적인 기업들이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대주주 경영을 문제시한다는 지적도 있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에 따르면 전문경영인체제가 발달했다는 미국에서조차 대주주가 없는 주식회사는 0.2%가 안 될 정도로 소수에 불과하다. 전문경영인체제가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주장 자체가 틀린 셈이다.
이병태 KAIST 경영학 교수는 “대주주 경영보다 전문경영인체제가 바람직하다는 경영학 이론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며 “대주주 경영이 잘못됐다는 정부의 인식은 1980년대 반재벌 운동을 하던 이념의 산물로 기업 경영과 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하는 소리”라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또 “한국의 대주주 중심 경영은 장기적 안목의 자본투자가 가능해 단기적인 성과에 휘둘리지 않는 성공사례로 꼽힌다”며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이 좋은 지배구조로 삼성전자와 현대차처럼 오너가 있는 기업들이 성과를 잘 내고 있는데 지배구조를 고치라고 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경영계에서는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미중갈등 등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일수록 대주주 경영체제의 장점이 드러난다고 분석한다. 불확실성이 큰 경영환경에서 전문경영인은 대규모 투자나 인수합병(M&A) 결정을 꺼리지만 대주주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공격적인 투자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 반도체 신화를 이끈 권오현 삼성전자 상임고문은 최근 사내방송을 통해 “전문경영인은 사업이 적자를 보거나 불황인 상황에서 수조원을 투자하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며 “어려운 시기일수록 제일 중요한 것은 강력한 리더십”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