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또 한 명의 택배노동자가 과로사로 세상을 달리했다. 그보다 며칠 전에는 서울 천호동의 호텔 공사장 현장에서 두 명이 추락사했다. 세상은 분명히 좋아진 거 같은데, 뉴스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누군가의 어이없는 죽음이 소개된다. 사회학자 오찬호가 끊임없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과 불평등, 혐오와 무례함을 지적하는 이유다. 최근 오랜 기간의 대학 시간강사 경력을 마무리하고 제주도로 이주해 집필에만 전념하고 있는 사회학자 오찬호 작가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Q. 새 책 제목이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이다. 제목만 봐서는, 드디어 오찬호 작가가, 좋아진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부제를 보니 ‘하지만 여전히 불편한 것들에 관하여’다. 이번 책은 어떤 책인가?
3년 정도 여기저기 기고한 글들을 모았다. 글을 다시 다듬고 추가하고 분류하는 작업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모든 글을 관통하는 제목을 고민했는데, 편집자가 정말 잘 정한 것 같다. ‘세상은 객관적으로 좋아졌다’는 건 팩트다. 하지만 이 팩트가 세상을 비판하는 사람을 염세주의자로 여기게끔 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이 어떻게 좋아졌는지 고민을 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나쁜 것’, ‘좋은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들이 과감하게 알려져야 한다. ‘낙관을 위한 비관적 글쓰기’,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Q. 이번 책을 읽으면, 우리가 쉽게 말했던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발언인지 알게 된다. 책을 안 읽은 독자를 위해 이 말이 내포하는 의미에 대해 설명해 달라.
먼저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건 자유다. 상당 부분 그런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게 누군가에게 조언이 되고, 마치 ‘인생의 진리’처럼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 한 달에 100만 원으로도 살 수 있다. 하지만 200만 원이면 훨씬 행복한 토대가 마련된다. 하루에 15시간을 일하면서도 ‘건강한 걸 감사하자’라고 생각하고 살 수 있다. 하지만 하루 8시간 정도를 일하고도 15시간 일한 만큼 소득이 보장되는 사회라면 행복한 사람은 더 많을 것이다. ‘마음먹기’를 안 해도 행복할 것이다. 즉 ‘불평등한 상황도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자’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불평등의 크기가 사회적으로 줄어들면’ 행복한 사람은 저절로 늘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Q.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마스크 대란이 일어났을 때, 마트 앞에서 새벽부터 사람들이 몰려와서 장사진을 이루자, 시민의식이 부족하다면서 쓴소리를 하는 고상한 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책에 썼다. 그 장의 제목은 ‘모두 똑같이 위태롭지는 않다’였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이 승자독식의 피라미드 사회라는 걸 누가 부인할까. 그렇다면 당연히 위기상황에선 가장 약자들부터 고통을 겪게 된다. 그리고 약자들은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칠 것이다. 이 모습을 ‘시민의식’이란 단어로 평가하면 세상은 ‘시민의식을 지킬 수 있는 자’와 ‘없는 자’로 구분될 것인데, 이는 곧 계층 차이에 따른 구별에 불과한 것이다. ‘모두가 힘들다’는 신호가 감지될 정도면, 이미 ‘약자들은 힘듦을 넘어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중’일 것이다. 사회안전망이 더 촘촘해야 하는 이유라 생각한다.
Q. ‘반칙은 누가 하고 있는가’라는 장을 보면, 인천국제공항의 보안 검색 요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하자, 공항공사 노조가 직원들과 합의하지 않은 일방적 결정이라며 비판했던 사건이 등장한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좋은 일인데, 왜 비판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능력주의는 ‘아기가 걸을 때부터’ 인간을 지배한다. 우리는 걷기, 말하기부터 ‘누구보다 더 빠르네, 느리네’라는 말을 하면서 사람을 평가한다. 그래서 또래 평균치보다 높으면 과잉칭찬을 낮으면 지나친 우려를 한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가고 취업을 위해 준비한다. ‘시험’을 마치 신이 내리신 절대적 공정의 평가체계로 받아들이는 건, 그건 능력주의의 출발점이다. 물론 그런 각도로 사회정책을 평가할 수 있다. 그건 자유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면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능력주의’의 문제는 사람을 조롱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능력주의는 일종의 ‘도덕과 윤리’로 인식되기 때문에 이 틀에 맞지 않는 자는 조롱받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부도 못하는 것이 말이 많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결과라고 할까? 그래서 토론이 되질 않는 것이다. 한 인간의 인생을 ‘나약함+나태함’으로 일순간에 납작하게 규정해버리고 온갖 혐오를 정당하게 해도 된다는 분위기, 참으로 끔찍하다.
Q.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게 된다. 근로현장에서 또 누군가 산업재해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다. 그래서 뉴스 상단에 오늘의 산재를 알리자는 주장이 와 닿았다. 왜 매일 똑같은 죽음이 되풀이 되고 있을까?
장혜영 국회의원이 예전에 했던 말이 있다. “불행이 아니라 불평등이다!”
쌍용자동차 굴뚝 농성으로 알려진 이창근 노동자가 이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아파트 경비원에게 주민들이 돈을 모아 에어컨을 선물하면 훈훈하다고 하지만 경비원들이 노조를 만들어 에어컨 설치를 요구하면 상황이 달라진다”고.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구조적인 원인을 찾아내고 구조적으로 해결책을 마련하는 시야가 매우 협소하다. 그저 ‘불쌍하다’ 정도의 동정적 시선만을 보여줄 뿐이다. 예를 들어 현재 ‘택배기사’, ‘배달노동자’의 처우에 관한 여러 논의가 등장하고 있지만 한편에선 ‘택배로 연봉 1억이 넘는다’, ‘배달노동 한 달에 400만 원 번다’ 등의 기만적인 기사가 등장한다. 끊임없이 불평등에서 ‘벗어난’ 사례를 제시하고 여기에 사람들이 익숙해지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자는 논의가 쉽게 공론화되질 않는다.
Q. ‘N번방의 사회학’을 이야기 할 때 등장하는 요즘 학생들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다.
이들은 ‘맞아 죽어도 싼 X’이라는 말에 너무 익숙하다. 개인에게 잘못이 있으면 다수의 리치가 정당한 것처럼 몸으로 배운 세대다. 어릴 때는 ‘왕따는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으로 배웠고, 커서는 ‘공부를 열심히 안 했으니 비정규직이 되었다’는 논리를 진리로 여기고 순응해야만 했다. (본문 136p)
문제는 이런 것들을 누군가 가르친 것도 아니고, 스스로 자라면서 몸으로 습득했다는 것이다. 즉, 단순히 교육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화 이후 우리가 겪었던 성공 만능주의 등이 가치관 또는 문화 시스템으로 체화된 탓인 것인가?
경쟁에 체념하는 ‘시간’이 너무 빨라졌다. “자본주의 사회는 어쩔 수 없어”, “세상은 강자가 지배하지” 등의 말을 오십이 넘어서 하는 것과 십 대일 때부터 받아들이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전자는 그래도 산전수전 겪은 어른의 득도이자 체념이라 어떻게든 버텨나가겠지만 청소년들은 그럴 인생의 연륜이 없으니까. 이는 경쟁에서 실패했을 때의 경험이 개인에겐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고, 상처의 깊이가 큰 만큼 자존감은 더 하락할 것이고, 나아가 사회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는 매우 나쁜 결과로 이어진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경쟁의 본질이 계속 견고해지는 걸 내버려두게 된다.
‘입시교육’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이는 단순히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양극화, 노동지위에 따른 차별, 최저임금의 문제 등등 여러 요인이 얽혀서 등장한 결과다. ‘차별과 혐오에 길들여지지 않는 교육’은 그 교육이 가능한 토대가 만들어지면 더 확실한 효과가 있겠지.
Q.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불편한 것들이 해소되는 대한민국은 정말 가능할까?
역사는 좋은 쪽을 향해 간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보편적 인권’이란 말 속에 포함되는 사람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코 낭만적이고 아름답지 않았다. 사람의 행복은 누군가가 고정관념을 깨는 만큼 가능할 것이다. 내가 차별의 피해자일 수도 있지만 가해자일 수도 있다. ‘원래 그런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조금이라도 깨기 위해 각자의 삶의 위치에서 자기 호흡으로 조금이라도 노력한다면 우리 사회는 좋은 쪽으로 이동할 것이다.
읽으면 우울해지는 글을 쓰고, 읽는 것은 분명 곤욕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곤욕스러운 시간을 통과하며 ‘여전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절대로 저절로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믿음에 동의한다면 이 책은 생각만큼 우울한 책이 아니다. 조금씩 좋은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으니까.
/김동호 기자 dongh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