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우편투표를 사기라고 주장하는 등 불복을 암시한 상태에서 대선이 치러지면서 미국 금융시장이 불확실성 우려에 따른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미국 금융시장은 전 세계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곳이어서 세계 곳곳의 금융시장도 함께 요동칠 것으로 예상된다.
10월31일(현지시간) 미국 언론을 종합하면 미 금융권은 정치적 불확실성이 금융시장에 큰 충격을 주는 ‘퍼펙트 스톰’도 가능하다고 보고 대비에 들어갔다. 최고 권력의 향방이 오리무중이 되고 곳곳에서 소요사태까지 일어날 수 있다는 관측에 힘이 실리면서 불확실성을 가장 두려워하는 금융시장이 과거 미 대선에선 찾아볼 수 없는 대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오는 3일 대선 당일 개표 결과가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이기는 것으로 나오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불복 선언을 하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좋지 않은 것은 개표 당일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기지만 우편투표 개표가 진행되면서 바이든으로 승자가 바뀌고 트럼프 대통령이 이에 불복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미국 정치권은 유례없는 혼돈 상황에 빠지고 금융시장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난 2000년 조지 W 부시와 앨 고어가 맞붙었을 때도 비슷한 혼란이 벌어졌다. 선거 다음날인 11월8일 오전2시30분께 미국의 모든 방송사가 부시의 당선을 선언하자 고어는 부시에게 축하 전화를 걸어 승복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플로리다에서의 격차가 0.05% 이내로 줄어들면서 고어 측은 오전4시 승복을 철회했다. 이후 플로리다 재검표 논란이 벌어지면서 전국이 한 달 넘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대선 결과가 불투명해지면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나스닥 등 주요 주가지수는 곧바로 크게 흔들렸다.
월가에서는 이번 대선도 결과가 확정될 때까지 불안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당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세가 가파른 상황에서 정치적 불확실성까지 겹치면서 이번주 시장도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지나 볼린 베르나두치 볼린웰스매니지먼트 대표는 “3월에 있었던 코로나19 때보다 최근 대선과 관련한 더 많은 문의가 온다”며 “며칠간 변동성이 큰 장세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요한 것은 승패가 언제 결정 나느냐다. 시장에서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승리 가능성을 55~65% 수준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바이든 후보 중 누가 되든 추가 경기부양책이 나와 시장에는 좋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월가에서는 승자가 결정되지 않은 채 정치적 혼란이 오랫동안 지속될 가능성을 큰 부담으로 느끼고 있다. UBS가 최근 투자자 1,000명과 기업인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가운데 36%가 대선을 앞두고 현금 비중을 확대했고 27%는 안전자산 비중을 높였다. 대선 결과가 불확실할 수 있다는 우려를 반영한 셈이다.
이는 추가 경기부양책을 비롯해 주요 경제정책이 올스톱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린제이 벨 앨리인베스트먼트 수석 투자전략가는 “이번 선거는 시장에 단기적·장기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라며 “투자자들이 선거 결과에 따라 포트폴리오를 조정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선거결과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10월 일자리 보고서 발표 등에 매우 불안한 한 주가 될 것”이라고 점쳤다. 다만 이번 미국 대선은 트럼프 대통령이 일찌감치 불복의 복선을 깔아놓았다는 점에서 2000년과는 다르다는 시각도 있다. 대선 불복과 정치적 혼란에 대한 예상이 이미 시장에 어느 정도 반영돼 2000년과 같은 극심한 혼란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미 대선의 혼란은 한국 금융시장도 크게 뒤흔드는 변수로 작용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0년 미 대선 이후 약 한 달간 이어진 널뛰기 장세다.
2000년 11월10일 565.18포인트를 기록했던 코스피지수는 13일 4.64%가 빠졌고 14일에는 다시 2.61% 뛰어 올랐다. 이후 11월 23일까지 계속 하락해 514.31포인트까지 떨어졌으나 24일과 27일 2거래일간 약 8%에 달하는 반등세를 보였다. 하지만 11월28~30일 3거래일 연속 약 8%나 지수가 빠졌고 12월4일부터 11일까지는 11%를 넘어선 오름세를 나타냈다. 12월12일 미 연방대법원의 결정이 나오면서 잠잠해질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코스피는 12월22일까지 10% 넘게 미끄러졌다.
국내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물론 당시 정보기술(IT) 버블 논란 등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면서도 “다만 이번 대선에서도 2000년과 유사한 혼란이 벌어질 경우 극도의 변동성을 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뉴욕=김영필특파원 맹준호·이완기기자 susop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