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회로 설계와 광통신 인프라 제조를 전문으로 하는 스타트업 A사는 창업 4년째인 올해 희비를 한꺼번에 맛봤다. 빅데이터·자율주행·인공지능(AI) 등 대용량 데이터 처리가 필수적인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A사를 찾는 곳도 크게 늘었지만 이를 뒷받침할 단기 자금 수요에 당장 대응하기 어려웠다. 안정된 재무제표나 실물 담보가 없어 자금 조달에 실패하고 폐업 위기에 처하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돌파구는 기술금융에 있었다. 다수의 특허와 기술인력을 보유한 A사는 한국특허전략개발원의 추천을 받아 신한은행으로부터 지식재산권(IP)을 담보로 8억원을 대출받았다. 신한은행은 이후 A사에 신용보증기금 보증대출 5억원과 순수 투자금 10억원도 추가로 지원했다. A사는 이를 통해 생산 기반을 안정적으로 늘리고 급격한 확대 경영에 대응할 수 있었다.
신한은행이 2년 새 기술신용대출(TCB)을 두 배 가까이 늘리며 국내 기술금융의 든든한 ‘뒷배’로 자리 잡고 있다. 중소기업 대출에서 기술신용대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올해 처음으로 30%를 넘어섰다. 취임 직후부터 ‘생산적 기업금융’을 강조해온 진옥동 신한은행장이 전담조직을 꾸리고 기업 생애주기에 맞춘 비금융 서비스를 융합하는 등 기술금융 체계를 갖추는 데 공들인 결과다.
12일 은행권에 따르면 올 9월 말 기준 신한은행의 기술신용대출 잔액은 35조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9조원 늘었다. 지난해 1년간 증가액(4조5,503억원)을 이미 훌쩍 넘어섰다. 올 들어 9월까지 새로 나간 기술신용대출 건수도 4만5,426건에 달했다. 이 역시 지난해 연간 신규 건수(3만3,985건)를 넘어선 규모다. 신한은행의 기술신용대출 신규건수는 2015~2018년 2만여건에 머물다가 올해 두 배 넘게 늘며 급증하는 추세다. 이에 힘입어 신한은행은 올 상반기 금융위원회 기술금융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기술금융은 기술력이 우수해도 부동산 담보가 없어 금융기관으로부터 돈을 빌리기 어려운 중소기업·스타트업에 대출이나 투자를 지원하는 제도다. 지난 2014년 도입됐지만 리스크 관리가 어렵고 제도적 기반도 미숙하다 보니 정부의 거듭된 독려에도 시중은행들로서는 적극적으로 늘리는 데 어려움이 컸다.
신한은행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IP·자체개발기계 등의 담보력을 평가할 수 있는 전담인력을 대폭 늘렸다. 혹시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시장에서 유동화할 수 있는 회수기관과의 협업도 확대해 리스크를 줄였다. 올해 선박평형수 처리장치업체 B사의 해외특허를 담보로 IP 대출을 내준 게 대표적 결실이다. 국내 금융기관이 해외특허에 대한 가치평가로 대출까지 실행한 것은 신한은행이 처음이다.
신한은행은 앞으로 기술혁신 중소기업을 더 많이 발굴하고 금융지원을 늘리기 위해 한국전자통신연구원·대학교산학협력단 등 기술사업 활성화 유관 기관과 협업을 확대할 예정이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내년 초 내부 기술평가 모형을 전면 업그레이드하고 데이터·디지털인프라 등 유망 기술 산업에 대한 평가 역량도 높일 계획”이라며 “부동산 담보 위주의 기업대출에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