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누적 확진자 수가 5,200만명을 넘어섰고 사망자 수도 130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전 세계인들이 힘없이 쓰러지고 있다. 자본주의 세계 경제체제가 휘청거리면서 사회적 약자들부터 차례차례 주저앉고 있다. 굳이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어떤 이는 우울증으로 몸져눕고 다른 이는 각종 생활고로 고꾸라지고 있다. 의기양양하게 세상을 활보해야 할 젊은이들마저 불안에 짓눌려 잔뜩 웅크리고 있다. 아예 일어서기를 포기한 채, 선우정아의 노래 제목처럼 ‘뒹굴뒹굴’ 바닥에 누워 있기를 선호한다. 사실 그 모든 이들에게 간절한 한마디 말은 아마 ‘일어서다’일 것이다. ‘일어서자! … 그런데 왜 일어서야 하지.’
어린이들의 무릎은 성할 날이 없다. 온통 상처투성이다. 툭하면 계속 넘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어섰기에 넘어질 수 있는 법이다. 지금 일어선다는 것은 앞으로 곧 넘어질 예정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동시에 아무리 고꾸라져도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약속이다. 넘어지지 않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겠다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다. 눈을 감기 전까지 다시 시작하겠다는 생의 의지 표명이다.
‘일리아드’에서 호메로스는 죽음을 자주 ‘무릎이 풀린다’라고 표현한다. 생명의 기운이 몸에서 빠져나가면 가까스로 버티던 무릎부터 풀리고 흐느적댄다. 그리스와 트로이 최고의 전사인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싸우는 명장면에서도 무릎이 등장한다. 아킬레우스의 창에 찔린 헥토르는 ‘목숨과 무릎과 어버이의 이름’으로 아킬레우스에게 애원한다. 자기 시신만큼은 고이 부모에게 보내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매정하게 거절한다. 복수심에 불타 심지어 시신을 훼손한다. 그러자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이 야음을 틈타 아킬레우스를 찾아와 그의 ‘무릎을 잡고’ 청원한다.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말이다. 여기에서 무릎이란 한 개인에게 소중한 ‘생명’을 뜻할 뿐만 아니라 그의 ‘존엄’을 상징하는 신체 부위이다. 인간의 존엄이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무릎이 꺾이는 숱한 좌절에도 다시 일어선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일어선다는 것은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말이다. 희망은 곧잘 ‘별’로 표현된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희망이 없는 지옥을 묘사할 때 별이 없는 암흑세계로 그리고 있다. 두 발로 일어선다는 것은 땅으로부터 하늘로 웅비하는 행위다. 풀숲을 헤집고 별을 보려는 간절한 소망의 상징이다. 그것은 멀리 별을 내다보며 삶의 좌표를 측정하려는 행위다. 하지만 일어서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찰흙으로 사람의 입상을 빚어본 사람은 알고 있다. 그 자그마한 두 발로 온몸의 무게와 균형을 감당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이다. 튼튼한 철제 뼈대를 바닥에 단단히 고정한 다음 그 위에 찰흙을 붙여야만 겨우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
일어서면서 한 마리의 유인원은 인간이 될 수 있었다. 호모에렉투스는 최초로 ‘호모’라는 명칭이 붙은 영장류다. 원래 호모라는 말은 ‘후무스(humus)’ 곧 ‘흙’이라는 뜻에서 파생됐다. 아마 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신화적 상상력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인간의 기원이 비천한(humble) 땅에 있음을 잊지 말고 겸손(humility)하라는 뜻도 들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출신 성분을 자주 망각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왜 쉽게 잊는 걸까. 땅에 밀착된 뭇 동물과는 달리 수직으로 일어선 인간 자신이 천상의 존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일어선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이웃과 자기 자신에게 다가가 사랑을 전하고픈 마음이다. 한때 이곳은 ‘헬조선’이라 불렸다. 단테의 통찰에 따르면 희망이 사라질 때 지옥문은 열린다. 그런데 왜 희망이 사라졌을까. 희망을 보장해준다는 것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희망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희망이란 인생의 사막에서 일어서게 하는 신기루로서 오직 사랑하는 마음에만 깃든다. 희망은 사랑의 부대 현상이며 사랑이야말로 마지막 희망이다. 사랑은 희망의 희망이다.
좌절로 가득한 이 시절에 일군의 예술가들이 모여 창작한(진행 중인) ‘일어서다’는 최근 가장 주목할 만한 예술적 기획이다. 그들이 창작한 영상은 아주 느리게 일어서는 이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영상 속의 인물들은 각자 자신이 처한 장소에서 힘겹게 일어선다. 내적 번민을 발밑에 두고 서서히 떠오른다. 여전히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가득하지만(‘일어서다2’), 당당하게 무릎을 편다. 자잘한 실망들은 있을지언정 이제 절망은 없다. 탁월한 예술적 이미지에 대한 철학적 화답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사랑한 만큼만 희망할 수 있다. 희망한 만큼만 일어설 수 있다. 사랑하는 이여, 일어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