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그림은 태워버리고, 바람을 전시한다

실험미술가 이승택,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이승택-거꾸로, 비미술' 25일부터 내년 3월

기존관념 뒤집는 '역발상'독자적인 길 개척

물,불,연기,바람 비물질적 재료로 대지미술

이승택 ‘바람’. 1970년 홍익대학교 건물 사이에서 선보인 작업을 50년 만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재제작해 미술관 앞마당에서 전시 중이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이승택 ‘바람’. 1970년 홍익대학교 건물 사이에서 선보인 작업을 50년 만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재제작해 미술관 앞마당에서 전시 중이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형체 없는 작품’을 생각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1950년대 말 뼈만 앙상하게 작업한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을 본 뒤 ‘뼈마저 부정하면, 남는 것은 형체 없는 작품 아닌가’ 골몰하면서부터다. 1964년에 ‘무제(하천에 떠내려가는 불타는 화판)’를 구상했다. 시(市)나 소방청이 허가할 리 만무했다.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 날 한강 변에 몰래 숨어들어 작업을 감행하다 저지당했고 거듭 도전하다 1988년에 재실행했다.

기존 질서에 반(反)하고 고정관념을 뒤집으며 한평생 ‘거꾸로’ 살아온 실험미술가 이승택(88·사진)의 일화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그의 60년 작품세계를 새롭게 조망한 대규모 회고전 ‘이승택-거꾸로, 비미술’을 25일 서울관에서 개막한다. 조각, 설치부터, 대지미술과 행위예술까지 넘나든 이승택의 250여 작품과 관련 자료를 선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제6전시실에서 개막한 이승택의 회고전 전경.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제6전시실에서 개막한 이승택의 회고전 전경.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미술관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감돈다. 푸른 천이 나부끼고, 종이가 매달렸는가 하면 옹기를 겹겹이 쌓은 등 괴이한 ‘것’들이 즐비하다. 그림은 ‘그리고’, 조각은 ‘깎고 빚는’ 것이 일반적이건만 이승택은 대학생이던 1950년대부터 ‘묶기’를 작업에 접목했다. 고드렛돌(발·돗자리를 엮으며 재료를 감아 늘어뜨리는 작은 돌)을 본 후 돌은 단단하다는 편견을 뒤집어 물컹한 재료로 형태를 만든 후 묶어 매달았다. 1958년 홍익대 졸업전시에 내놓은 ‘역사와 시간’은 색 입힌 석고 덩어리를 철사로 꽁꽁 묶은 작품이다. 냉전 시대의 한복판에 살던 작가가 파란색으로 미국, 빨간색으로 소련을 상징해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서러운 우리 민족을 철사에 묶인 형태로 제작했다. 돌도 묶고, 백자도 묶고, 사람까지 묶었던 그는 줄에 묶여 눌린 자국의 팽팽한 긴장감에서 억압과 벗어나려는 의지를 동시에 표출했다.

실험미술가 이승택.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실험미술가 이승택.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승택이 전통 옹기를 비롯해 비닐, 유리, 각목, 연탄재 등 일상 사물들로 새로운 ‘재료 실험’에 몰두한 것은 1960년대부터다. 대학 2학년 때 받침대 하나에 두 개의 조각상을 올려 국전(國展)에 출품했다가 ‘1좌대 1작품’을 철칙으로 여기던 심사위원의 궤변을 들었던 그는 실험적으로 택한 재료들을 ‘좌대 없이’ 바닥에 놓고, 탑처럼 위로 쌓아올리거나 제멋대로 천장에 매달곤 했다. 이승택 식 ‘비조각(非彫刻)’이다. 독 짓는 마을로 유명한 함경남도 고원 출신의 작가는 집집마다 놓인 친근한 옹기를 재료로 즐겨 썼는데, 1964년작인 ‘성장(오지탑)’이 이번에 재제작됐다. 다 사라져 사진만 남은 1960~70년대의 기념비적 작품 10여 점을 다시 제작한 것은 이번 전시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다. 미술관 전시마당에는 1988년 서울올림픽 기념전에서 선보였던 ‘기와 입은 대지’가 재연됐다. “지붕 위에서만 있던 기와가 땅으로 내려와 광활한 대지와 인간을 감싼다”는 작가의 말이 이뤄진 작품이다.

이승택의 1988년작 ‘기와 입은 대지’가 재제작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마당에 설치돼 있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이승택의 1988년작 ‘기와 입은 대지’가 재제작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마당에 설치돼 있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그에게는 ‘바람’도 재료였다. 1970년 홍익대 빌딩 사이에 100여m 길이의 푸른 천을 한 줄로 매달아 바람에 휘날리게 했다. 종친부 마당 등 미술관 야외에서는 이승택의 대지미술 ‘바람’ 3점을 만날 수 있다.


비물질적인 작업만 해 온 작가는 돈 벌 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인물상이다. 손재주가 뛰어났으니 후원자들의 의뢰를 받아 흉상을 제작했고 마련된 자금을 실험 작업에 원 없이 쏟아부었다. 백상 장기영 서울경제 사주,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 흉상 등이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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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 대해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승택은 물, 불, 연기, 바람, 시간 등 비물질적인 것을 미술로 끌어들인 선구적 작가”라며 “지난 6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도전해온 그의 여정을 되짚어보고 미술사적 위상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배명지 학예연구사의 유튜브 전시설명,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영국 서펜타인갤러리 관장의 인터뷰 등이 수록된 도록 등이 제작될 예정이다. 전시는 내년 3월28일까지.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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