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은 본능적으로 ‘가진 자’를 때린다. 살아가며 ‘갑’에게 설움을 받았던 모든 ‘을’들은 갑을 때리는 정치인에게 대리 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갑보다 숫자가 많은 을들은 그런 정치인을 지지하고, 정치인의 호감도도 그만큼 손쉽게 올라간다.
그래서였을까. 최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은행을 공개적으로 불러 모으고 나섰다. 이 대표는 4대 금융지주의 현업 부행장은 물론 회장과도 잇따라 통화와 화상회의를 갖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임대인과 임차인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대출이자 부담을 완화해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임차인이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부담을 완화해주는 것이 정치의 책무라고 볼 수 있다. 코로나 시국에도 사상 최대 수익을 올리는 금융사가 임대인·임차인과 고통을 분담하라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후 있을 일을 생각하면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금융지주 회장이 유력 대권 주자로부터 직설적으로 요구를 받았으니 이 문제를 직접 챙겨볼 테고 임대인·임차인의 이자 부담은 머지않아 줄어들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은행원은 ‘숫자’에 목숨이 달린 직업이다. 은행장 임기는 보통 1년에 불과하며 당기순이익이라는 숫자가 나쁘면 자리를 보전하기 힘들다. 은행은 줄어든 임대인·임차인 관련 이자 수익을 일반 직장인의 신용대출·주택담보대출 등의 금리를 슬며시 올리는 방식으로 충당할 것이다. 결국 임대인·임차인의 이자 비용을 국민이 부담하는 것이 된다.
문재인 정부도 집권 후 자영업자 카드 수수료를 낮췄다. 카드사들은 줄어든 수수료 수익의 상당 부분을 일반 소비자에게 주던 각종 부가서비스·혜택을 줄여서 충당했다. 역시 자영업자 카드 수수료 인하 비용을 국민이 진 셈이었다. 내년 4월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 이듬해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표를 갈구하는 정치권의 ‘금융 공략’은 더욱 빈번해질 것이다. ‘을’을 위한다는 금융 공약의 비용은 누가 대는지, 이로 인해 누가 최종적으로 득을 보는지 무심코 흘려들으면 안 되는 시대가 왔다. ‘관치’도 울고 갈 ‘정치 금융’의 시대다.
classic@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