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요즘 같아서야 어디 살맛이 납니까. 정말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같은 절망의 목소리를 이제 주변에서 심심찮게 듣는다. 2주간 자가 격리를 한 지인들이 내 주위에도 벌써 5명을 넘어섰다. 영업 제한에 걸려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자영업자들의 한숨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돼 있다. 그래서 어느 가수는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라고 절규한다. 정말 처절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뉴노멀의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독일에서 있었던 일이다. 파우스트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가 절망에 빠져 자살하기 직전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가 나타난다. 악마는 이런 제안을 한다. “살아생전에 나는 너의 종이 되겠다.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단 저세상에 가서는 네가 나의 종이 돼야 한다.”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이야기다. 파우스트는 악마와 자신의 영혼을 파는 계약에 서명한다. 살면서 모든 욕망과 쾌락을 다 누린 파우스트가 마지막으로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하며 죽는다. 과연 파우스트는 악마와의 계약대로 지옥에 갔을까. 아니면 첫사랑인 그레트헨의 노력으로 영혼을 구제받고 천당에 갔을까. 이 부분은 학자들의 해석에 맡기기로 하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영혼을 판 대가로 받게 되는 쾌락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어느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프로젝트가 85% 진행된 상황에서 마지막 점검 회의가 열린다. 한 팀원이 이렇게 말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큰 문제가 있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때 또 다른 팀원이 말한다. “일단 납품하고 나서 바로 애프터서비스에 들어가면 어떨까요.” 여러분이 이 회사 대표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그렇게 하겠는가. 이것이 영혼을 파는 계약을 악마와 맺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있었던 일이다. 땅에 관심이 무척 많은 한 농부가 있었다. 헐값에 땅을 살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가봤더니 계약서에 이렇게 쓰여 있는 게 아닌가. ‘단돈 1만 원만 내면 해가 떠 있는 동안 직접 걸어서 다닌 땅을 다 주겠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농부를 보면서 악마는 만면에 미소를 띤다. 해 뜨자마자 이 농부는 출발한다. 걸어 다니다 보니 여기저기 좋은 땅들이 널려 있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평생 꿈꿔오던 바로 그 많은 땅들이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걸어 다녔다. 그러다 이제 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기 시작한다.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급한 마음에 뛰기 시작한다. 숨이 차오른다. 결국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길에서 죽고 만다.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라는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다. 영혼까지 끌어서 땅 사재기에 나선 농부의 최후를 비극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한때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을 호되게 야단치던 시절이 있었다. 돈을 한 푼 두 푼 아껴 자신의 집을 장만하려고 해야지, 없는 형편에 기를 쓰고 자가용부터 사려고 하다니. 그러나 요즘은 젊은이들이 영혼까지 끌어다 집을 사려고 한다. ‘영끌’해서 주식을 사는 동학 개미, 서학 개미도 있다. 주식을 사고, 부동산을 사는 것 자체를 누가 문제 삼겠는가. 문제는 ‘영끌’하고 ‘몰빵’ 하는 것이 그저 조마조마할 뿐이다. 계란을 여러 바구니에 나눠서 담아야 한다. 영혼은 함부로 끌어다 쓰는 것이 아니다.
영혼을 몽땅 끌어다 쓰고 영혼을 싹 다 팔아서 없애 버리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악마와 계약하기 전에 영혼 사용 설명서부터 먼저 읽어라. 영혼은 올바른 가치를 지키는 것이다.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돈과 쾌락으로 다 바꿔서는 안 된다. 영혼은 가치를 지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자유와 평등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와 공정한 경쟁에 기초한 시장 제도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모든 조직은 고객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개인도 자신과 가족의 행복에 대해 일차적 책임을 져야 한다.
/송영규 기자 sko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