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물량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 이탈리아가 자국 생산 백신의 해외 수출에 제동을 걸었다. 또 오스트리아와 덴마크는 유럽연합(EU) 비(非)회원국인 이스라엘과 ‘백신 동맹’을 꾸렸고 미국은 이웃 국가인 멕시코의 백신 확보 요청을 거부하는 등 국가 간 코로나19 백신 조달 전쟁이 치열하다. 전반적으로 ‘백신 국가주의’ ‘백신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백신을 지렛대로 국제 정치 무대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백신 외교전'도 불을 뿜고 있다.
4일(현지 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이탈리아 정부는 최근 다국적 제약 회사 아스트라제네카와 영국 옥스퍼드대가 공동 개발해 자국 내 공장에서 최종 포장된 코로나19 백신 25만 회분의 호주 수출을 불허했다. 이탈리아 당국은 지난달 26일 이 같은 결정을 EU 집행위원회에 알렸고 EU 집행위도 이에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수출이 불허된 백신은 EU 역내에 재분배된다.
이탈리아의 이번 조치는 EU가 지난 1월 말 도입한 ‘백신 수출 통제 규정’을 적용한 첫 사례다. EU는 제약 회사가 EU와 계약한 백신 공급량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역외 수출을 허가하지 않는 규정을 제정했다. 당시 아스트라제네카가 생산 차질을 이유로 올 상반기 EU 회원국들에 대한 백신 공급을 당초 계약한 물량에서 절반가량 줄이겠다고 통보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앞서 인도 정부도 올해 초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공급 계약을 맺으면서 자국 백신 제조사 세룸인스티튜트가 위탁 생산하는 물량의 해외 수출을 금지한 바 있다.
오스트리아와 덴마크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코로나19 백신을 접종 중인 이스라엘과 손을 잡았다. 제바스티안 쿠르츠 오스트리아 총리와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는 4일 이스라엘을 방문해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코로나19 백신 연구 개발을 위한 공동 기금 조성에 합의했다. 이를 두고 EU 당국이 주도해 백신 사용을 승인하고 제약 회사와 계약을 체결해 27개 회원국에 배분하는 EU의 백신 정책에 균열이 생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스라엘은 인구 100명당 접종 비율이 97.47%에 달하지만 EU 전체 인구 4억 4,700만 명 중 코로나19 백신의 첫 회 접종을 마친 사람은 5.5%에 불과하다. 공급 부족과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효과에 대한 회원국 간 이견 등으로 접종에 차질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헝가리·슬로바키아 등은 EU에 반기를 들고 중국·러시아 등과 직접 접촉해 물량을 확보하는 등 ‘각자도생’에 나섰다. 이들 국가는 이달 초 러시아 백신 '스푸트니크V'의 긴급 사용을 승인했으며 헝가리의 경우 중국 시노팜 백신도 도입해 접종하고 있다.
전 세계 코로나19 누적 확진자 수 1위, 사망자 수 1위의 불명예를 안은 미국은 국방물자법(DPA)까지 동원해 모든 미국 성인에게 접종할 코로나19 백신 확보 시기를 당초보다 2개월 앞당기겠다고 밝혔지만 백신 공급난을 겪는 이웃 국가들의 도움 요청은 외면하고 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최근 멕시코 측이 코로나19 백신 확보와 관련해 도움을 청했지만 “우리 국민이 우선”이라며 백신 나누기를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각국의 코로나19 백신 확보전에 대해 ‘백신 이기주의’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유엔과 세계보건기구(WHO) 등이 백신의 공정한 분배를 잇따라 촉구하고 있고 선진국들도 이에 공감한다는 의사를 내비치지만 구호에 그칠 뿐이라는 지적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러시아 등은 아프리카 개발도상국 등을 대상으로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AFP통신에 따르면 중국은 알제리·세네갈 등 아프리카 국가에 백신 약 20만 회분을 제공했으며 파키스탄과 도미니카공화국에도 각각 50만 회분, 75만 회분을 공급했다.
/노희영 기자 nevermind@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