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에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지 50일째인 지난 22일 올해 14살인 툰 툰 아웅은 만달레이의 자기 집 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소년이 살던 먀이난다 주택가에 이날 300명 가량의 중무장 군인이 나타났다. 불도저 2대를 앞세우고 거리의 바리케이드를 치우던 군인들은 갑자기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다수의 시민들이 쓰러졌다. 이때 소년도 가슴에 총을 맞았다. 소셜미디어에는 소년이 집 문을 잠그던 중이었다는 이야기가 올라왔다. 시위 참가자가 아니라는 의미다. 이날 하루 동안에만 만달레이에서는 군경의 총격으로 최소한 8명이 숨진 것으로 파악됐다.
미얀마 인권단체인 정치범지원협회(AAPP)에 따르면 지난 2월1일 쿠데타가 발생한 이후 이달 22일 현재 시위 등의 과정에서 확인된 사망자만 최소 261명에 달했다. 여기에는 14살 툰 툰 아웅과 함께 19세 ‘태권소녀’ 치알 신도 포함됐다. 쿠데타 세력은 오히려 민간 시위대에 책임을 떠넘겼다. 군부 대변인인 조 민 툰 준장은 23일 TV를 통해 방송된 기자회견에서 “군경의 시위 진압과정에서 164명이 숨졌다”고 밝히며 “시위대가 기물을 파괴하고 부채질 했다”고 주장했다.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로 민주 정부가 무너지며 대혼란이 발생한 지 50일이 지났지만 사태는 전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미얀마 내에서는 시위가 무자비한 유혈 진압으로 이어지면서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유엔 등 국제사회는 제재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기도 한 중국의 반대에 가로막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쿠데타의 배후 조종자이거나 적어도 방조자가 되는 셈이다.
미얀마 쿠데타 세력의 ‘뒷배’로 중국을 지목하는 쪽에서는 중국이 적극적인 유도는 아니더라도 무기나 자금을 제공하면서 사실상 묵인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중국 당국은 ‘미얀마에 대해 내정간섭은 하지도 않고 해서도 안된다’고 펄쩍 뛰고 있다. 현재 미얀마의 정국 상황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국가가 중국이라는 것은 국내 외에서 모두 인정되는 사실이다.
동남아시아 지도를 보면 의문이 가는 점은 미얀마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의 성격이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미얀마의 가장 큰 이웃은 인도다. 미얀마는 인도와 육지 뿐만 아니라 벵골만 바다를 통해서도 접해있다. 역사상으로도 미얀마는 인도의 동쪽 끝이자, 동남아시아와 인도의 접경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는 인도를 지배한 영국이 미얀마(당시 이름은 ‘버마’)까지 지배하고 있었다.
중국의 영향력이 미얀마에 침투한 것은 미얀마 자체의 원인보다 중국의 글로벌 패권 다툼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중국이 대중국 봉쇄망을 뚫고 해외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미얀마가 중요한 루트가 됐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처음 미얀마의 가치를 인식한 것은 약 80년 전인 중일전쟁 때다. 중국(당시는 ‘중화민국’)이 일본군의 공격에 의해 동부와 남부 해안지대를 모두 빼앗긴 상황에서 미얀마를 통해 외부 지원을 받기 위해 뚫은 것이 바로 ‘버마 공로(Burma Road)’다. 미얀마 북부 라시오에서 중국의 윈난성 쿤밍까지 1,100㎞에 이르는 산악지대 도로가 1938년 완공된다.
이후에도 중화민국은 이 도로를 보호하고 일본군을 막기 위해 1943년부터 총 28만명의 군 병력을 미얀마 전선에 직접 투입했다. 전투의 사상자만 8만명에 달했다. 미얀마 원정군은 20세기 들어 중국이 파견한 첫 번째 해외 원정군이자, 1950년 한국전쟁(중국식 표현으로는 ‘항미원조’ 전쟁)의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에 이어 두 번째 규모였다.
어쨌든 중국 원정군은 미얀마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당시의 동맹국이 미국과 영국이었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미얀마로서는 새로운 외적을 물리쳤을 뿐 과거의 ‘주인’(영국)에 다시 귀속된 것이었지만 그래도 훨씬 악독한 일본에 지배되는 것은 피했기 때문에 중국에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고 해서 중국·미얀마 관계가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1949년 국공내전에 패한 중국군(중화민국군)이 미얀마 국경지대에서 새로운 중국의 ‘주인’(중화인민공화국)과 게릴라전을 벌이는 것이 문제였다. 미얀마 정부로서는 새로운 공산 중국이 미얀마 공산당을 지원하는 것도 불만이었다.
중국에서 마오쩌둥 시대가 끝나고 덩샤오핑이 이른바 ‘개혁개방’을 진행하면서 미얀마와 중국의 관계는 안정을 되찾았다. 덩샤오핑은 미얀마 반정부 세력에 대한 지원을 끊었고 이에 대해 미얀마 정부도 중국과 교류를 시작했다.
중국·미얀마 관계가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1988년 8월 8일 미얀마에서 터진 이른바 ‘88항쟁’ 이후다. 당시에도 미얀마 군부가 양곤 등지에서 벌어진 반군부 시위를 무력 진압했는데 이후 국제사회의 제재가 시작되자 결국 중국 쪽으로 다가갈 수 밖에 없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중국이 미얀마와의 관계에서 중점을 둔 것은 ▲미얀마 안의 자원 확보 ▲에너지 수송로 구축 ▲중국 서남부의 안정·개발 등이다. 중국은 윈난성 등 서남부의 안정이 일찍부터 관심사였다. 중국과 미얀마 국경에는 주류인 한족과 미얀마족과는 다른 민족들이 많이 살았다. 특히 정정불안에 시달린 미얀마에서는 소수민족들이 미얀마 정부군과 게릴라전을 벌였고 그 전투가 종종 중국 국경 너머로 확산되기도 했다. 역시 소수민족이 많이 사는 윈난성으로는 골치아픈 문제였다.
자국내 소수민족 탄압은 최근 미얀마의 로힝야족 학살까지 이어지는 양국 관계의 기본요소가 됐다. 중국은 미얀마군의 소수민족 탄압을 묵인했고 때로는 지원하기도 했다. 현재 중국도 비(非)한족 소수민족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개혁개방 과정에서 중요해진 것은 미얀마의 자원 확보였다. 중국은 원래 석탄 등 지하자원 부국으로 1980년대까지 에너지의 자급이 가능했다. 하지만 개혁개방 후 급속한 경제개발로 에너지 소비가 급증했고 1993년 결국 석유 순수입국으로 돌아섰다. 경제개발을 위한 에너지자원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미얀마의 자원에 당연히 관심을 가졌다. 미얀마는 세계 10대 천연가스 생산국이다. 이외에 구리·텅스텐·희토류 등 지하자원과 함께 중국인이 좋아하는 옥·루비도 풍부하다. 30여년간의 서방의 경제제재는 미얀마 자원의 판로를 중국 쪽으로 이동시켰다.
최근 들어 가장 중요해진 것은 수송로다. 중국은 지난 2017년 미얀마에서 윈난성으로 송유관을 깔았다. 중국으로서는 미국이 동남아시아 해상로를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자원확보를 위해 미얀마 루트가 절실해진 상황이다. 중동과 아프리카 등에서 수입한 석유는 미얀마 항구에서 하적돼 송유관을 통해 중국 윈난성으로 수송된다. 미국의 함대가 포진하고 있는 동남아를 지나갈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중국은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했고 미얀마는 통행료를 챙겼다.
중국이 지난 2013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사업에 미얀마가 중요한 국가로 여겨졌음을 두말할 나위도 없다. 유엔 무역통계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미얀마의 수출과 수입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31.7%와 34.7%로, 국가별 모두 1위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지난해 미얀마의 외국인직접투자(FDI) 가운데 중국이 38%를 차지하면서 싱가포르에 이어 2위라고 전했다. 이외에 미얀마 군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무기의 최대 수출국도 중국이다.
앞서 군부 통치기의 미얀마 때 중국이 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일당독재 체제인 중국 공산당으로서는 민주국가보다 독재국가가 거래하기에 편하다. 미얀마 군부로서도 나쁠 것 없었던 모양이다. 군부 독재를 비판하는 미국 등 서방과는 달리 중국은 자신들의 체제에 왈가왈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문민정부로 권력이양에 성공한 2016년 이후 다소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서방 국가들은 민주 미얀마가 중국의 하수인에서 벗어나길 기대했다. 물론 실제로 역사가 그렇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이라는 수치도 차이나머니를 거부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중국으로서는 미얀마 군부가 더 나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방의 눈치를 보는 민주화 주역 아웅산 수치보다는 독재적인 군부가 더 중국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다.
군부든 민주 진영이든 중국으로서는 미얀마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생 직전 지난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유일한 해외 순방지가 바로 미얀마였다. 중국 상무부에 따르면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2020년 중국과 미얀마의 무역액은 총 188억9,000만달러로 전년대비 1.0% 늘어났다. 미얀마에 대한 중국의 수출이 125억5,000만달러로 1.9% 증가했고 수입은 63억4,000만달러로 0.7% 감소했다. 중국기업의 지난해 미얀마 투자는 2억6,000만달러로 7.8%나 증가했다.
올해 들어서도 왕이 외교부장이 미얀마를 방문했다. 왕이 부장의 미얀마 방문은 시기적으로 애매했다. 지난 1월11일 왕이가 미얀마를 방문해 수치 여사는 물론 이번에 쿠데타를 일으킨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량관을 만났는데 이는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 전 외국사절을 만난 마지막 자리였다. 서방 언론들은 이 자리에서 군부가 쿠데타 의사를 알렸을 가능성을 제기했고 중국은 이를 완강히 부인했다.
중국은 국제사회의 미얀마 제재에 대해 무조건 반대하고 있다. 군부 쿠데타도 미얀마 내정이기 때문에 외국이 간여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미얀마 군부와 공산 중국이 가까워진 역사를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반응으로 보인다. 미 워싱턴 싱크탱크 스팀슨센터의 윈쑨 선임연구원은 “중국의 전략은 항상 ‘우리는 누구든 권력을 잡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이라며 “그게 바로 중국식 도덕적 유연성이다”고 말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다만 이러한 중국의 유연성이 미얀마에서 계속 성공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군부를 빼고 미얀마 국민들의 중국에 대한 인식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공장들이 습격을 받아 불타기도 했다. 군부측이 고용한 폭력배들이 벌인 조작극이라는 말도 있지만 어쟀든 미얀마인의 대중국 인식은 역사상 최악으로 하락을 했다. 군부가 타도될 경우 민주파들이 과거처럼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전략도 변화하고 있다. 미얀마에 대해 경제 제재를 할 경우 미얀마 군부가 더 중국 쪽으로 붙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인권’을 앞세우는 바이든 행정부가 손 놓고 있기는 힘들게 됐다. 이미 인도를 대중국 포위망에 집어 넣은 상태에서 바로 이웃인 미얀마에 구멍이 생기면 안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