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가득한 스카프를 디자인해 주세요. 일차원적인 디자인 말고 꽃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디자인이 필요해요. 어떤 방향에서 보더라도 꽃이 보이는 스카프 말이예요."
1966년 구찌 창업주 구찌오 구찌의 막내아들 로돌포는 실크 인쇄업자에게 이런 주문을 한다. 그의 주문대로 디자인된 가로 세로 90㎝ 크기의 스카프는 40가지가 넘는 색상을 인쇄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품이었다. 스카프의 주인은 모나코의 그레이스 왕비. 이탈리아 밀라노의 구찌 매장에 방문한 왕비를 위한 선물이었다. 브랜드의 상징 중 하나가 된 '플로라 스카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구찌가 시도한 플로라 디자인은 의류나 가방, 부속품에 이르기까지 온갖 장신구에 응용됐다. 구찌 브랜드를 전 세계 대중에게 알린 첫 번째 상품이 된 셈이다.
책 '하우스 오브 구찌'는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를 일군 구찌 가문에 대한 이야기다. 이탈리아 패션 매거진 편집장이던 저자는 구찌 가문의 역사와 관련된 100명의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신문과 잡지 등 관련 문헌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을 추적해 소설처럼 재구성했다. 책은 80여 년에 이르는 구찌 가문의 역사를 통해 가업에서 출발해 세계적인 명품 기업으로 성장한 유럽의 패션하우스와 창업주들이 맞닥뜨린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구찌는 1921년 이탈리아 피렌체 명품 거리와 가까운 아르노 강둑 인근의 작은 상점에서 출발했다. 창업주인 구찌오 구찌는 지인에게 빌린 돈으로 빈 상점을 임대해 '발리제리아 구찌오구찌'를 창업한다. 당시 구찌오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을 비롯해 독일과 영국의 제조업체들로부터 가죽 제품을 사들여 피렌체로 여행 온 관광객들에게 되팔던 소매상에 불과했다. 그러다 상점 뒤편에 조그만 공방을 열어 가죽 제품을 직접 만들기 시작한 것이 입소문을 타면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이탈리아에서 이름난 브랜드로 성장한 구찌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상류층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1950년대 중반 구찌 핸드백이나 여행용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세련된 스타일과 안목의 소유자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됐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할리우드 스타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이 구찌의 고객이었다.
그 무렵 구찌는 미국 뉴욕에 진출해 큰 성공을 거두며 전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확장해나간다. 새로운 소재를 사용한 ‘뱀부백'과 ‘모카신 로퍼’ 등 히트 상품을 연이어 출시해 60~7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로마, 런던, 뉴욕, 도쿄 등에 매장을 내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올라선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미국 내 구찌 총책임자이던 구찌오의 아들 알도를 '초대 주미 이탈리아 대사'라고 불렀다.
하지만 가족 간 치열한 경쟁을 유도한 구찌 가문의 교육 방식은 구찌오 사망 이후 경영권 분쟁으로 이어진다. 구찌 브랜드의 가치도 80년대 들어서 급격하게 하락했다. 맞물린 형태의 'G' 로고가 들어간 캔버스백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흔해졌고, 구찌 운동화는 미국 마약상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하락한 브랜드 가치를 되돌리기 위해 구찌는 명품 업계 최초로 투자은행과 손잡고 변화를 추구하지만 경영권을 둘러싼 가족 간 소송전으로 난관에 봉착했다. 90년대 초반까지 매출이 급락하면서 구찌 가문은 빚더미에 올라앉고, 창업주의 손자 마우리치오는 1993년 투자은행에 회사를 매각하면서 가족 기업인 구찌를 마지막으로 운영한 인물로 남게 됐다.
가족의 손을 떠난 구찌는 90년대 초 미국의 패션 디자이너 던 멜로와 톰 포드 등을 영입해 브랜드 혁신 작업을 추진하며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시작한다. 이후 피노프랭탕르두트그룹(PPR)과 손잡고 새로운 명품 그룹을 만들어내며 패션업계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 이른다. 명품 업계 최초로 기업공개(IPO)를 단행한 것도 구찌였다.
책은 가문의 마지막 최고경영자(CEO) 마우리치오의 충격적인 암살 장면을 시작으로 3대에 걸친 구찌 가문의 역사를 연대 순으로 정리했다. 드라마틱한 구찌 가문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영화 소재로 거론됐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번번히 무산됐는데, 리들리 스콧 감독은 10여 년의 기다림 끝에 이 작품을 영화화하는데 성공했다. 책과 같은 제목의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가 올해 11월 개봉될 예정이다.
저자는 80여 년 가족사가 개인 소유 가족기업의 명암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결국은 그것이 100년 넘게 지속되는 명품 브랜드의 원동력이기도 하다고 평가한다. “가족 불화가 신문 1면을 장식할 때마다 구찌 가족은 망신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갈등과 그에 수반되는 유명세는 불가해한 마법으로 작용해 구찌라는 이름을 아찔한 매력과 세련미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구찌는 오늘날에도 기존의 구찌 스타일을 재해석한 제품들을 선보이며 유행을 선도하는 명품 브랜드로 젊은 세대의 사랑을 받고 있다. 2만2,000원.
/최성욱 기자 secre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