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와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비록 사회가 어둡고 어지러워도 역사를 길게 보고 자신과 세상에 대해 긍정적 에너지를 분출하고 확장해야 합니다.”
원종현(사진)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관장(신부)은 7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담아 서소문역사공원에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을 세운 것이 2주년이 돼가는데 순교자들의 뜻이 무엇일까 늘 곰곰이 묵상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원 관장은 지난 1989년 사제 서품을 받고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부위원장과 천주교 서울대교구 절두산순교성지 주임신부를 같이 맡고 있으며 천주교와 관련된 수많은 각종 전시를 통해 종교문화를 널리 알리고 있다.
그는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은 종교는 물론 역사, 문화, 전시, 미술, 미디어 아트가 어우러져 힐링을 줘 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나름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며 “순교의 피 어린 역사가 주는 메시지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제 서소문역사공원은 조선 시대 물류 중심지로 시장이 크게 발전했는데 국가의 최대 사형터로 사용되기도 했다. 신유박해(1801년)·기해박해(1839년)·병인박해(1866~1873년) 동안 전국적으로 3만여 명의 순교자가 나왔는데 이곳에서 이승훈·정약종·정하상 등 8,000~1만 명이 숨졌다. 원 관장은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서 성인과 복자 등 가장 많이 순교했다”며 “고(故) 김수환 추기경께서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방한과 103위 성인 시성을 기념해 순교자 현양탑을 건립했고 염수정 추기경님과 수많은 신자들이 노력해 2019년에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을 열게 됐다”고 설명했다. 프란치스코 전 교황이 2014년 방한해 광화문에서 대규모 미사를 드리기 전에 이곳 현양탑에서 묵념을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순교자들의 정신에 비춰볼 때 오늘날 시사점은 뭘까. 원 관장은 “선각자들의 많은 희생을 딛고 역사는 더디지만 뚜벅뚜벅 진보해왔다”며 “인권, 존엄성, 천부적 권리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하에 자신과 세상을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고 해석했다. 이어 “세계든 국가든 사회든 나 자신이든 부정적 에너지가 긍정적 에너지를 짓누르게 해서는 안 된다”고 힘줘 말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세계적으로 경제적 양극화와 정치·이념·인종 갈등이 표출되는 상황에서 통합과 화합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원 관장은 “이곳 서소문을 비롯 당고개·새남터·절두산 순교성지를 연결해 스페인 산티아고처럼 국제순례길을 2018년 교황청으로부터 아시아 최초로 공식 지정 받았다”며 “순례길을 걸으면서 화합의 가치를 되새겼으면 한다”고 말했다. 앞서 그는 바티칸박물관에서 ‘한국 천주교 230년’ 전시를 3개월간 하는 등 국제순례지 지정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당시 그는 순교자들의 고귀한 뜻을 선양하는 것은 물론 세계 13억 천주교 신자 중 한국 등 아시아의 신자 비율이 낮다고 호소해 세계 천주교 지도자들의 공감을 끌어냈다.
그는 “‘서로의 다름을 틀린 것이라고 규정하고 장벽을 쌓아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다진다”며 “우리가 사회와 사람들에게 실망할 때도 있다. 하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귀향해 폭격으로 허물어진 교회를 보고 ‘저것마저 없었다면 인간은 한갓 동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성의 최후 보루가 남아 있다’고 긍정적으로 보려 노력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하느님이 인간의 눈높이에 맞춰 인간의 언어와 방식으로 대화하는 것처럼 지도자·부모·교사 모두 국민이나 자식·학생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해야 한다”며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강제하면 탈이 난다”고 지적했다. 그가 오는 12일부터 6월 30일까지 ‘공(空)’을 주제로 현대불교미술전을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하는 것도 종교와 사상의 경계를 넘어 화합을 다지는 한편 모두에게 열린 복합 문화 공간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다.
원 관장은 기성세대가 할 일은 다름을 틀림으로 치부하지 않고 건전한 상식과 인류의 보편적 가치, 민족의 DNA가 배양되도록 모범을 보이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앞선 세대가 희생하며 살아갔던 세상이 제단이고 인간인 나는 거기에 바쳐진 제물”이라며 “한 젊은이한테 ‘남북 간에 전쟁을 해 이기면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기도 했는데, 이렇게 사회 구성원이 다양해졌다. 희생과 사랑만을 강요할 수 없는 시대”라고 했다. 이어 “좋은 의도일지라도 급속히 세상을 바꿔나가려면 좋은 결과만 낳는 게 자칫 차별과 부작용의 염려도 있다”며 “더디지만 역사의 진보를 믿고 포용의 가치와 긍정적 에너지를 키워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