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암호화폐·블록체인과 ‘거리 두기’를 했던 국내 주요 은행들이 다시 관련 시장에 속속 발을 내딛고 있다. 국내 굴지의 은행들이 암호화폐 관련 업무에 참여하면서 해외와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암호화폐의 제도권 편입이 가시화되는 분위기다.
우선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관련 업무에 은행이 참여하고 있다. 14일 하나은행은 포스텍 크립토블록체인연구센터와 CBDC 기술 검증을 수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나은행은 한국은행이 CBDC를 발행할 때 예상되는 시나리오를 검증해 시중은행이 정상적으로 유통할 수 있도록 이달 말까지 시범 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다. 현재 시중은행은 한은이 돈을 찍어 내면 이를 시중에 유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같은 개념으로 한은이 CBDC를 발행하면 이를 시장에 유통하는 테스트를 하겠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한은의 CBDC 발행 이후 이어지는 시중은행의 공급, 개인의 교환 및 이체·결제 등 디지털화폐가 실제 돈처럼 원활하게 융통될 수 있는지 여러 시나리오를 검증하고 있다. 중앙은행이 재난지원금을 디지털화폐로 뿌리는 경우에 대비해 CBDC가 특정 업종 또는 지역에서만 결제되도록 하거나 일정 기간만 사용되도록 조건을 설정하는 것도 가능하게 설계했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이번 연구를 시작으로 CBDC 도입에 적극 동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한은행은 이보다 앞선 지난달 LG CNS와 디지털화폐 플랫폼 시범 구축을 끝냈다. 플랫폼은 ‘한은이 CBDC를 발행해 중개기관에 유통→중개기관인 신한은행은 발행된 CBDC를 개인에게 지급→개인 및 가맹점은 발행된 CBDC를 활용해 조회·결제·송금·환전·충전’을 하는 식으로 구성됐다.
블록체인 기술도 활용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이날 ‘헤데라 이사회’에 가입했다고 밝혔다. 헤데라는 정부 주도의 중앙화가 아닌 기업 주도의 탈중앙화된 네트워크다. 구글·IBM 등 세계 주요 기업이 이사회 구성원이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헤데라 분산원장 기술(블록체인)은 속도·공정성·안전성을 갖추고 있다”며 “다양한 업종의 글로벌 기업들과 차세대 금융 솔루션 협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밖에도 국내 은행들은 가상자산 수탁(커스터디) 사업에도 진출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지난해 11월 해치랩스·해시드와 합작 법인 ‘한국디지털에셋(KODA)’을 설립하고 지분 투자 방식으로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 수탁 사업 참여를 선언했다. 신한은행도 지난 1월 신규 법인 ‘한국디지털자산수탁(KDAC)’에 지분 투자를 했다. 지난달 우리금융그룹 소속 우리펀드서비스도 금융기술사 피어테크와 ‘디지털자산 기업회계 플랫폼’ 출시 계약을 체결했고 농협은행도 지난해 블록체인 전문 기업 헥슬란트 등과 가상자산 수탁 사업 진출을 공식화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은행들의 움직임은 지난 몇 년과 비교하면 180도 다른 것이다. 국민·우리·기업은행 등은 암호화폐거래소와 제휴를 맺고 송금 서비스를 해왔지만 2018년 초 정부의 ‘가상화폐 자금세탁 방지 가이드 라인’이 시행되고 해킹 등의 사고가 터지면서 손을 뗐다. 이후 암호화폐·블록체인에 대한 관심도 시들해졌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전 세계적인 암호화폐 열풍과 제도권 편입 움직임이 일자 다시 뛰어들고 있다.
은행들은 비트코인을 펀드에 편입하는 것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시중은행 디지털 부문 임원은 “펀드에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을 2%만 편입해도 기대 수익률이 크게 올라 고객을 유치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이와 관련해 캐나다에서는 세계 최초 비트코인 상장지수펀드(ETF)가 출시 승인(퍼포스 ETF)돼 13일(현지 시간) 현재 운용 규모가 10억 달러가 넘었고 미국에서는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이태규 기자 classic@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