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대기업 일반 지주회사에 벤처캐피탈을 둘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지만, 현재까지 주요 기업 지주사 중 대기업 주도 벤처캐피털(CVC)을 세운 것은 이랜드 그룹 한 곳 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 지주사에 CVC를 둘 수는 있지만 크기를 제한하고, 총수 일가에 형사처벌을 강화하는 규제가 덧붙은 탓으로 보인다. 대기업 내부에서 벤처투자에 대한 이해나 의지가 적은 점도 원인으로 풀이된다. 반면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CVC를 설립한 해외에서는 짧은 역사에도 활발한 투자활동을 벌이고 있어 대조된다.
29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일반 지주회사가 CVC를 세울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현재까지 대기업 집단 가운데 이랜드 그룹만 지주사 산하 자회사로 이랜드벤처스를 설립했다. 이랜드벤처스는 지난 1월 중소벤처부 창업투자회사로 인가 신청을 냈다. 창투사는 비슷한 성격의 신기술금융사보다 자본금 요건이 100억 원으로 낮은 대신 투자 영역이 좁다. 인수합병(M&A)을 통해 성장한 이랜드 그룹은 CVC를 통해 패션·유통 등 본업과 관련한 스타트업에 투자할 계획이다.
정부가 벤처투자 업계 건의를 받아들여 일반 지주회사가 CVC를 설립할 수 있게 한 이유는 계열사에 CVC를 둘 경우 규모가 작고 특정 영역에 치우치기 때문에 그룹 차원의 육성이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지주회사를 둔 국내 대기업 28개 가운데 이미 지주사 밖에 CVC를 보유한 4곳을 뺀 24곳이 주요 대상이다.
◇규제 완화 후 생긴 대기업 주도 벤처캐피탈
지주사는 아니지만 교보생명은 자회사인 지난해 말 교보증권을 통해 기업당 1,000억원, 최대 1조원까지 벤처 투자를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초기 스타트업 발굴을 위해 만든 이노스테이지에서 선발한 헬스기업 관련 5개 스타트업을 우선 투자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다.
넥센타이어는 지난달 미국 실리콘밸리에 넥센 센츄리 벤처스를 세웠다.넥센 전략기획실장인 이진만 대표이사는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탈 출신으로 본업인 타이어 외에 모빌리티 분야에 집중 투자하겠다는 포부다.
SK그룹이나 LG·GS 등 대기업 계열의 CVC 설립을 기대했지만 현재까지 뚜렷한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주사가 CVC지분을 100% 보유한 완전 자회사 형태여야 하는 점, 부채비율 200% 이내, 외부 자금 출자 40% 이내만 허용한 점, 총수 일가가 CVC 투자 벤처 지분 매입을 막은 점 등 제한이 뒤따르기 때문이라는 게 표면적인 이유다.
대기업 내부 문화도 걸림돌로 지적된다. 기존 투자 조직을 활용하는 경우에는 단기 성과를 요구하기 때문에 10개 기업에 투자하면 9개는 실패하고 1곳에서 성공하는 벤처캐피탈의 속성과 맞지 않는다.
여러 계열사아 공동 출자한 경우 이해관계가 달라서 효율적인 투자 집행이 어렵고, 안전한 후기 단계 기업에만 투자하면서 일반 투자와 다를게 없게 된다. 독립계 벤처캐피탈 관계자는 “설립 후 10년 간 투자에 성공한 기업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고, 최근 들어 과거 투자한 기업에서 투자 수익을 거두고 있다”면서 “대기업 조직에서 이런 특성을 받아들일 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해외의 경우도 CVC의 본격적인 역사는 2015년부터로 길지 않다. 그러나 구글 등 주요 대기업은 소규모 조직으로 발빠르게 투자를 집행하며 장래 먹거리로 키우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인 CB인사이트에 따르면 연간 글로벌 CVC의 투자액은 2015년 322억 달러(35조원 가량)에서 2019년 571억 달러(63조여 원)로 높아졌고, CVC가 주도한 투자 건수는 같은 기간 1,713건에서 3,324건으로 약 두 배 늘었다. 가장 활발한 미국에서는 2020년 3분기까지 벤처 투자 중 CVC가 약 26%의 비중을 차지했다. CB인사이트가 2018년 투자 활동 활발한 정도를 기준으로 한 집계를 보면 구글벤처스가 압도적이고 세일즈포스닷컴의 세일즈포스벤처스, 인텔의 인텔캐피탈이 뒤를 잇는다. 국내 CVC 중에서는 카카오벤처스가 유일하게 8위에 선정됐다.
구글의 경우 초기와 후기, 인공지능으로 주요 투자 분야에 따라 투자 조직을 나누고 각각을 독립적인 자회사로 운영해 의사결정과 전문성을 높였다.
김이동 삼정KPMG 스타트업지원센터 전무는 “국내 기업들이 CVC를 통해 기업의 탐색 기능과 양손잡이 역량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면서 “스타트업의 초기 단계에서는 CVC를 통해 지분투자를 하고, 라운드를 거쳐가며 새로운 시너지를 줄 수 있는 투자자를 모색하고 기업과 사업적 관계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세원 기자 wh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