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코로나19 사태 장기화와 경제 양극화, 부동산 시장 불안, 미래 성장동력 부족 문제 등을 뒤로 하고 임기 1년을 남기게 됐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태로 어느 때보다 높은 국민적 기대를 업고 출범한 정부임에도 경제·사회·정치 각 분야에서 공정·정의·평등이라는 핵심 가치를 실현하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가 뒤늦게라도 4·7 재보궐선거로 확인된 민심을 겸허히 다시 살피고 재정 중독과 친노동, 징벌적 부동산 세제, 반기업 규제 등 그동안 고집해온 국정 운영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9일 정·관·재계 인사들과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가 무엇보다 차기 정부와 미래 세대에 부담을 주는 확장 일변도의 재정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매년 120조 원 이상씩 나랏빚이 늘면서 국가 채무 비율이 지난해 43.9%에서 오는 2024년 59.7%까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저출산·고령화 국면에서 선심성 지출만 늘리기보다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비해 지금부터라도 지속 가능한 재정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급격하게 인상된 최저임금을 비롯해 노동시간 단축에 초점을 맞춘 친노동 정책도 일자리 창출과 기업 경쟁력을 악화시킨 요인으로 꼽힌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 등 친(親)노동 정책을 강행하면서 기업들이 요구하는 고용 유연화는 뒷전으로 밀렸다는 비판이다. 박지순 고려대 로스쿨 교수는 “현재의 임금과 근로시간 등은 산업화 단계에서 제조업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낡은 전근대적 노동 제도를 어떻게 현대화할 것이냐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치솟는 집값을 보유세와 종합부동산세 등 징벌적 세금 부과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이념적 정책도 철회해야 할 부분으로 지목된다. 이미 수 차례 이어진 세금 규제가 처방법이 아님이 검증됐음에도 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시장을 이념으로 눌러보겠다는 시대착오적 고집이라는 것이다.
소득 주도 성장,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획일적 주52시간 근로제 도입,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등 쉴 틈 없이 쏟아진 반기업 규제도 이제는 숨통을 터줘야 한다는 요구가 곳곳에서 나온다. 한층 치열해진 글로벌 산업 경쟁과 고용 절벽을 감안해 기업들에 더 과감한 투자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는 의견이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자신의 소득이 하위라고 생각하는 국민일수록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낮은 경향을 보인다”며 “이는 소주성 등 현 정부의 경제정책이 철저히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문 대통령은 10일 취임 4주년을 맞아 특별 연설을 하고 기자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갖기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일 노동절 메시지에서 “코로나 위기가 노동 개혁을 미룰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노동시간 단축은 일자리를 나누며 삶의 질을 높이는 과정”이라며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 회복의 첫걸음이라는 마음으로 고용 회복과 고용 안전망 강화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기존의 친(親)노동정책을 남은 임기 기간에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의미다. 반면 노동 개혁의 핵심인 고용 유연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같은 노동 개혁을 언급했지만 경영계와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대통령의 인식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왔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4년간 노동계에 더욱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든 친노(親勞) 정부였다. 최저임금은 4년간 34.8% 올렸고 소상공인들의 반대에도 주 52시간 근로제를 강행했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과 중대재해처벌법 등 친노동법도 제정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경영계는 물론 노동계에서도 외면받고 있다. 경영계와 노동계의 불만이 쌓이면서 정작 필요한 노동 개혁은 첫발도 떼지 못하고 있다. 노동 개혁이라는 말 자체가 금기시됐다.
통계청장과 한국개발연구원(KDI)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유경준 국민의힘 의원은 “민주노총 등 기득권 정규직 근로자에 몰두한 결과 노동시장의 약자를 위한 제도 개선은 오히려 후퇴했다”며 “친노동자 정부도 아닌 친노동조합 정부로 노동 개혁은 흔적도 찾기 어려워 낙제점을 주기도 아깝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기업은 위기인데…언제까지 ‘쉬운 해고’ 논란만=역대 정부에서 고용 유연성 제고는 ‘쉬운 해고’라는 노동계의 반발에 부딪혀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증유의 코로나19 사태 이후 고용 유연성 제고는 기업의 생존과 근로자들의 지속 가능한 노동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고용 유연성이 제고되면 기업들은 경기 상황에 따라 인력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해 경쟁력을 높이고 청년층의 고용 여력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국내 노동계의 현실은 노조 중심의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노사정이 마주 앉아 노동 현안을 풀어내기 어려운 구조다. 한국경제연구원 분석 결과 파업이나 쟁의로 인한 근로자 1,000명당 노동 손실 연평균 일수(2008~2018년)는 41.8일로 일본의 172.4배에 달했다. 세계경제포럼이 노사 협력 수준을 평가한 결과(2019년 기준) 141개 조사 대상 국가 중 한국은 130위로 하위권에 머물렀다. 김강식 한국항공대 경영학부 교수는 “선진국에 비해 해고도 어렵지만 퇴사자가 다른 기업에 재취업하기도 어렵다”며 “고용 유연성 정책에 대한 고민 없이 근로자 보호만 강화하면 기업은 오히려 고용을 기피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강화되는 사회 안전망…친노 정부가 노동 개혁 난제 풀어야=고용 유연성 제고의 성공 요건은 정부가 부당한 해고를 막을 의지와 역량을 갖췄는지 여부다. 사회 안전망이 너무 느슨하거나 친기업 중심으로 정책 방향이 설계되면 고용 유연성 제고의 역기능이 더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노동 정부를 표방하는 문재인 정부가 노동 유연성을 제고해 노사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지난 4년간 고용·의료 등 사회 안전망 강화에 대한 지출을 대폭 늘리고 제도를 강화해왔다. 이제 남은 1년이라도 용기 있게 노동계 설득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영계와 노동계가 서로 다른 방향을 보는 노동 개혁에 대한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며 “정부는 (남은 1년동안) 노동 개혁에 대한 타협 선을 어떻게 찾을지 밑그림을 그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럽 병자였던 독일…하르츠 개혁으로 실업 극복=독일은 1990년대까지 20%대의 실업률을 기록하며 ‘유럽의 병자’로 조롱받았다. 하지만 30여 년이 흐른 지난해 독일의 실업률은 6%대 수준까지 감소했다. 2003년 ‘하르츠 개혁’을 통해 파견 기간 상한(2년)을 폐지하고 해고제한법을 적용하지 않는 사업장의 근로자 기준을 5인 이하에서 10인 이하, 다시 20인 이하까지 늘리는 노동 유연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친 결과다.
해외 선진국들은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용 유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노동시장을 안정시켜왔다. 덴마크는 매년 전체 근로자의 25%까지 해고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직 활동을 돕고 실업자의 사회 안전망을 강화해 노사가 ‘윈윈’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경제성장을 꾀한 점이다. 추광호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정책실장은 “노조의 일방적인 대응은 장기적으로 기업과 산업 경쟁력을 악화시켜 구조 조정으로 귀결되는 악순환을 낳을 수 있다”며 “노측에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파업 시 대체 근로 허용과 직장 점거 금지와 같은 노사가 동등하게 협의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경환 기자 ykh2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