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으면 양지 바른 곳에 묻어 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유해(遺骸)가 처리될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법적인 효력이 없는 유훈(遺訓)에 불과하다. 유언은 법률이 정한 방식으로, 법률이 정한 내용을 정할 때에만 법적인 효력을 갖는다.
현행법상 유언으로 정할 수 있는 것은 △재단법인의 설립, △친생부인(親生否認), △인지(認知), △미성년후견인의 지정, △상속재산분할방법의 지정 또는 위탁, △상속재산 분할금지, △유언집행자의 지정 또는 위탁, △유증, △신탁 등에 한정된다. 유체나 유골에 관한 처리는 유언의 대상이 아니다(대법원 선고 2007다27670).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가족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상당수의 국민들은 지금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지금 이 순간 가족들의 안위를 챙기느라 자신의 사후에 펼쳐질 가족들의 삶에 대하여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유언을 남기더라도 유언으로 정할 수 있는 내용에 한계가 있고, 유언의 형식적 엄격성으로 인해 그 효력이 문제되면서 분쟁이 빈번하다. 또한, 유언으로 상속재산을 나눌 경우, 상속재산이 피상속인의 사망과 동시에 유언의 내용대로 상속인에게 이전되기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예컨대, 피상속인의 사망 당시 미성년 자녀가 유일한 상속인이고 배우자와 이혼한 상태였다면, 친권자로 지정된 이혼한 배우자가 미성년 자녀의 상속받은 전 재산을 관리하게 되는데 피상속인이 이러한 상황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미권에서는 오래 전부터 상속의 수단으로 신탁이 활용돼 왔다. 신탁을 하면 앞서 언급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정밀한 사후설계가 가능해진다. 앞서의 사례에서 피상속인은 재산을 신탁하고 미성년자가 성년이 될 때까지는 매월 최소한의 생활비 정도만 지급한다. 대학에 입학하거나 창업을 하는 등의 이벤트가 있을 경우 1,000만 원씩 지급하며 35세가 되면 나머지 상속재산 전부를 지급하도록 하는 등으로 구체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러 상속인 중 특정 상속인이 가업을 잇는 경우, 혼인 후 자녀의 수가 많을 경우 각각 상속재산을 더 많이 주는 것으로 정할 수 있다. 이런 상속설계는 피상속인이 평소 중시하던 가치의 수행을 상속의 조건으로 정함으로써, 일종의 “가치상속”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
신탁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떠난 후의 가족들의 삶에 대하여 보다 진지하고 구체적으로 고민해보게 된다. 신탁을 하면, 이런 고민 없이 떠났을 때보다 가족들의 삶에 훨씬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당신이 어디에 묻힐 지를 기대하는 희망도 단순한 유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훨씬 강한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손구민 기자 kmsoh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