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내에서 성추행 피해를 당해 극단적 선택을 한 여성 부사관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며 여론이 들끓고 있다. 군이 그간 각종 성비위 사건들을 은폐·왜곡해 왔다는 의혹 속에 사실상 자정 능력을 잃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르는 상황이다. 여야를 비롯해 군 최고 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 역시 이번 사건 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이미 이성용 공군참모총장이 즉각 사퇴한 것을 비롯해 서욱 국방부 장관 등 최고위 지휘라인까지 자리를 담보하지 못하게 됐다. 다만 이번 사건으로 군 내 만연했던 부조리들이 제도적·관행적으로 과연 획기적으로 개선될 지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라는 평가도 나온다. 대선 정국을 앞두고 다른 이슈들이 잇따를 경우 정부와 정치권의 관심이 순식간에 식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 인권 문제와 직결된 사안인 만큼 정부와 여야가 굳은 결의로 합심하지 않으면 이번에도 일부 책임자만 문책한 채 본질적인 변화는 끌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부대 선임 강제추행에 극단 선택…군 비판 여론 들끓어
공군과 유족 측에 따르면 지난 3월 초 공군 소속 A중사는 충남 서산의 한 공군 부대 선임인 B중사의 권유로 저녁 식사 자리에 억지로 불려나갔다. A중사는 이후 귀가하는 차량 뒷자리에서 B중사에게 강제 추행을 당했다. A중사는 이에 다음 날 피해 사실을 유선으로 정식 신고한 뒤 두 달여 간의 청원 휴가를 사용했다. 지난달 18일 전속 부대로 출근한 A중사는 그러나 남자친구와 혼인신고를 한 21일 돌연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 과정에서 성추행 피해 당시 소속 부대의 일부 간부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A중사를 회유·압박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A중사 소식이 일파만파로 퍼지자 서욱 국방부 장관은 해당 사건을 공군에서 국방부 검·경으로 이관했다. 수사단은 성추행 상황을 원점부터 다시 들여다보며 피해자에 대한 회유·압박 여부, 사건 은폐·무마 여부, 피해자의 최초 신고 내용 보고 여부, 피해자 보호 조치 등을 조사했다.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은 지난 2일 군인 등 강제추행치상 혐의로 B중사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군 비판 여론은 ‘부실 급식’ 논란에 이어 정치권을 다시 한 번 강타했다. 박완주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3일 국방부에 “군인의 명예를 걸고 엄중하고 철저하게 수사해 달라”며 “자성과 환골탈태 수준의 개혁 없이는 재발 방지 대책은 공염불에 그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는 4일 “우리 군이 처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군정농단’ 사건”이라며 “군 통수권자로서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하고 국방부 장관의 즉각적인 경질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3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번 사건은 명백한 타살”이라며 “관련 부대와 성 군기 관련 보고라인 전체에 대해 이분의 죽음에 대한 사법 책임을 강하게 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비판 강도 하루하루 높인 文대통령…이성용 총장은 전격 사임
여론의 추이가 심상치 않자 문 대통령도 하루하루 비판 강도를 높였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지난 2일 기자들과 만나 “(문 대통령이) 부사관의 극단적인 선택과 관련해 굉장히 가슴 아파하신다”고 말했다. 다만 별도의 지시는 없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서욱 국방부 장관도 김부겸 국무총리의 철저한 진상조사 관련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특별한 지시나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상황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고 계시다”고 설명했다. 앞서 김부겸 총리는 1일 서 장관과 전화통화를 하고 “조직적인 2차 가해 의혹을 철저히 수사하고 관련자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문 대통령은 다음 날인 3일이 돼서야 직접 지시를 내렸다.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서면 브리핑을 통해 문 대통령이 참모들과의 회의에서 수사기관의 엄정한 처리를 강력 지시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절망스러웠을 피해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며 “피해 신고 이후 부대 내 처리, 상급자와 동료들의 2차 가해, 피해호소 묵살, 사망 이후 조치 미흡 등에 대해 엄중한 수사와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특히 “이 문제를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에서만 보지 말고, 최고 상급자까지 보고와 조치 과정을 포함한 지휘라인 문제도 살펴보고 엄중하게 처리하라”는 주문도 했다. ‘최고 상급자’에 서 장관도 포함되느냐는 질문에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날 “지휘라인이라고 하면 다 배제하진 않을 것”이라면서도 “상급 지휘관이 어떤 직위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고 답했다. 서 장관의 거취도 포함될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이 지시 직후인 4일에는 이성용 공군참모총장이 전격 사의를 표했다. 공군이 출입기자단에 공개한 사의문에 이 총장은 “성추행 공군 부사관 사망 사건 등으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사과드린다”며 “무엇보다도 고인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며 유족 분들께는 진심 어린 위로의 뜻을 전해드린다”고 밝혔다.
서욱 경질까지 배제 안 한 靑…文 “병영문화 바꿔라”
문 대통령은 이 총장 사의와 전역 절차를 속전속결로 처리했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4일 이 총장이 사의를 표한지 80여 분만에 브리핑을 열고 “문 대통령은 이 총장의 사의를 즉각 수용했다”며 “사표 수리 절차를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 건은 참모총장 본인이 조사·수사를 받아야 될 수도 있는 사안들이 겹쳐 있기 때문에 이 절차를 가급적 빠르게 진행하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서 장관의 경질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도 “최고 지휘 라인의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며 “보고·조치 과정에 문제가 있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중 처리할 것”이라고 답했다.
문 대통령은 나아가 10일 이 총장 전역을 재가했다. 박 수석은 이날 브리핑에서 박 수석은 “감사원·경찰청 등 수사기관의 확인을 거친 결과 절차상 전역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박 수석은 “성추행 피해 부사관 사망 사건과 관련해 현재까지 공군참모총장으로서 사건을 축소·은폐하려는 행동은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면서도 “하지만 추후라도 관여한 사실이 확인되면 수사기관에서 조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도 공군 성추행 사건에 대한 반성이 강하게 투영됐다. 문 대통령은 이날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6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최근 군내 부실급식 사례들과 아직도 일부 남아있어 안타깝고 억울한 죽음을 낳은 병영 문화의 폐습에 대해 국민들께 매우 송구하다”며 “군 장병들의 인권뿐 아니라 사기와 국가안보를 위해서도 반드시 바로잡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이 군 내 부실급식 논란과 성폭행 은폐로 숨진 공군 여군 부사관 사건에 대해 사과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문 대통령은 같은 날 예정에는 없던 A중사 추모소 방문도 진행했다. 문 대통령은 A중사 부모님에게 “얼마나 애통하시냐”며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고 위로했다. A중사 아버지는 “딸의 한을 풀고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고, 어머니는 “철저하게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이에 “철저하게 조사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부모님의 건강이 많이 상했을 텐데, 건강 유의하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함께 추모소를 방문한 서 장관에게 “철저한 조사뿐 아니라 이번 계기로 병영 문화가 달라지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정치권, 국정조사·특검·군사법원법 잇딴 요구…관심 이어질지는 미지수
국민의힘·정의당·국민의당·기본소득당은 10일 국회 의안과에 ‘성폭력 피해자 사망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요구서’와 ‘군 성폭력 및 사건 은폐·무마·회유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을 야당 국회의원 112인의 공동 발의로 제출했다. 이들은 “군 검찰단 등이 성폭력과 같은 비군사적인 사안에 대해 독립적이고 엄정하게 수사하고 그 원인까지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의구심을 품고 있다”며 “이번 사건은 군 기강과 군 성범죄 근절 등 군의 근간과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이번 사건의 실체를 신속하게 규명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은 국방위원회, 여성가족위원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의원들로 구성된 ‘군 범죄 근절 및 피해자 보호 혁신 테스크포스(TF)’에서 제도 개선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TF 단장을 맡은 국회 국방위원장 민홍철 민주당 의원은 지난 3월 군 고등군사법원을 폐지하고 국방부 장관 소속의 군사항소법원을 신설해 항소심을 이관하는 내용의 군사법원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문 대통령도 7일 병영문화 개선을 위한 추가 대책을 지시했다. 문 대통령은 “최근 군과 관련해 국민들이 분노하는 사건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차제에 개별 사안 넘어서 종합적으로 병영문화를 개선할 수 있는 기구를 설치해 근본적 개선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 “이 기구에 민간위원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사고가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체계를 만들라”며 군사법원법 개정안의 조속한 처리를 당부했다.
현 시점까지 보면 일단 정치권은 방법론은 다르더라도 병영 문화가 개선돼야 한다는 인식은 같이 하는 모양새다. 다만 이 같은 관심이 얼마나 이어질 지는 두고 봐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찮다. 확실하게 뿌리를 뽑는 결론이 나기 전, 여론의 관심이 식거나 다른 정쟁 요인이 부각할 경우 이번 사안에 대한 근절책은 뒷전이 되기 십상인 탓이다. 군 내 성비위 사건에 관해 ‘일부’ 단체가 아닌 범국민적인 관심이 지속돼야 하는 이유다.
※‘국정농담(國政濃談)’은 행정·외교안보·정치 관련 ‘농도 짙은’ 현장 이야기와 현안 소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윤경환 기자 ykh2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