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로 여는 수요일] 눈사람


강영환


대설주의보가 지나간 벌판에 서서

햇살만으로도 녹아내릴 사람이다 나는

한쪽 눈웃음으로도 무너져 내릴 뼈 없는 인형이다

벌판을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곁에 왔다

걸어온 길은 돌아보지 않는다

앞서갈 길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내 지키고 선 이 자리에서



여분으로 남겨진 사랑도 가슴에서 뽑아낸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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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없이 떠나고 싶을 뿐

얼어붙은 바람 속에서 쓰러지지 않는다

그려 붙인 눈썹 떨어져 나간 뒤

그대 뿜어낸 입김에 빈터로 남을 뿐

젖지 않고 떠난 자리에 남겨진 나뭇가지 입술은

무슨 말을 하려다 다물었는지

끝내 숯이 된 눈으로 남는다 나는

그대 온기 담은 눈빛에도 녹아내릴

가까운 햇살이 두려운 사람이다





깃털처럼 내렸지만 주먹처럼 단단해졌죠. 밟을수록 뭉치고, 굴릴수록 커졌죠. 빗자루만 꽂아도 만세를 불렀죠. 숯덩이 눈동자에 웃음이 담겼죠. 무골호인이라죠. 심장을 감쌀 갈비뼈조차 없었죠. 강자에게 강했고, 약자에게 약했죠. 어떤 북풍도 우릴 쓰러트리지 못했지만 아지랑이 봄 미소에 사르르 녹았죠. 사라졌다지만 스몄어요. 꽃으로 스미고, 열매로 스몄죠. 팔월의 눈사람을 본 적 있나요. 거리마다 우뚝 서 있는 초록 눈사람들을 모르시나요. 당신이 쩌억 가른 수박 속에서도 붉은 잇몸으로 웃고 있는 우리를 정녕 모르시나요. 당신은 우릴 잊어도 우린 당신을 잊은 적이 없죠.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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