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은 가장 낮은 곳, 맨 밑바닥에 놓였다. 그 위로 용암이 당장 굳어버린 것 같은 검고 둥근 형태가 얹혔다. 어쩌면 지구 그 자체일지도 모를 불룩한 덩어리 표면에 동서고금의 가장 드높았던 권력과 권위와 부의 상징이 다 모였다.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신(Ra)을 의미했던 왕쇠똥구리, 석가모니의 어머니가 태몽에서 품에 안았다는 코끼리, 용맹함의 상징인 사자를 비롯해 똬리 튼 뱀과 집 지은 거미 등이 황금빛을 내뿜으며 자리를 잡았다. 위로는 티베트 사원이나 태국의 신전 같고, 러시아 교회 같기도 한 첨탑이 솟아 올랐다. 요란할 정도로 화려한 장식의 거울이 맨 꼭대기를 차지했다. 현대미술가 이수경의 조각설치 작품 ‘달빛 왕관-용의 신부’다.
이수경의 최근작 중 ‘달빛 왕관’ 연작을 한 자리에 모은 개인전이 오는 9월 26일까지 종로구 율곡로3길 아트선재센터 2층에서 열린다. 깨진 도자기의 갈라진 금을 금(金)으로 이어 붙인 ‘번역된 도자기’ 연작은 작가의 ‘시그니처’다. 지난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출품됐고, 런던 대영박물관에도 소장됐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달빛 왕관’ 역시 별개의 재료들을 하나로 이어 붙여 새 형체를 이룬다는 점에서 콜라주 방식을 변용한 기존 작업과 공통분모를 갖는다.
작가는 신라의 금관과 백제의 금동대향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기존 왕관이 신적 권위의 상징이었다면 이수경의 왕관은 ‘내면의 반영’이기에 받침대로 몸을 낮췄다. 이 작가는 “특별한 권력자가 쓰는 왕관이 아니라 나 자신이 왕관처럼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내면의 신성을 발견한 나 자신이 하나의 신전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했다”면서 “태양이 남성적 권력을 상징한다면 달빛은 그에 가려진 이면, 상상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작품 전체가 탑의 형태를 갖는 데 대해서는 “왕관에서 시작해 하늘로 뻗어 가는 신성한 기운을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작가가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십자가, 동물 문양, 식물 표본, 기도하는 손, 천사 얼굴, 거울조각 등이 작품의 소재가 됐다. 유럽 귀족 집안의 문양으로 사용된 사자와 우리나라 사찰 건축에서 쓰인 사자형 조각이 같이 놓이고, 고대 실크로드를 넘나들었을 동서양의 사슴 형상이 함께 배치됐다.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 등장하는 천사와 사자가 아래위로 마주보기도 한다. 전작에서도 그랬듯 ‘대칭 구조’를 즐기는 작가는 밝음의 이면인 어둠,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 등 이분법적으로 나뉘던 것들에게 ‘공존’을 허락한다. 다양한 상징 체계들이 작가적 상상력으로 물리적, 시간적, 권력적 거리감을 극복해 현실에 없는 이상향을 이뤘다. 권력이 권위를 내려놓고 가장 낮은 곳으로 몸을 숙이는 것 또한 이상향에서나 가능하듯 말이다.
과거 상징과 권력을 표현했던 기호들이 현대 소비 사회에서는 그저 물건이자 장식이기만 한 것으로 전락한 것도 작가에게는 동인(動因)이 됐다. 작가는 “동서고금의 상징적 오브제를 도상적으로 구분하면 한계를 갖고 말지만 상상으로는 이들을 한데 모아 내러티브(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다”면서 “한계를 탈피하고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작가의 생각은 자유롭다. 이상의 시를 읽고 만든 ‘장난감 신부’에는 실제로 작가가 어려서부터 모았던 장난감, 요술봉 등을 사용했다. 작가는 “어려서부터 ‘세일러문’ 등을 좋아하며 만화적 상상력을 키웠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서 세일러문의 유명한 대사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외침 같은 ‘편견 없이 정의로운 세상’이 구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