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정이 백신·반도체·2차전지 등 ‘국가핵심전략기술’이나 해당 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매각할 때 정부 승인을 받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현재는 국가의 연구개발(R&D) 지원(비용)을 받지 않은 기술은 신고 절차만 밟아도 매각이 가능한 가운데 향후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기술인 경우 정부 승인을 통해 기술 유출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한 조치다.
10일 더불어민주당 반도체기술특별위원회에 따르면 ‘국가핵심전략기술특별법’에 국가핵심전략기술을 이전 또는 매각할 경우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해당 기술을 가진 기업이 해외 기업과 인수합병(M&A)하거나 해외 자본의 투자를 유치할 때도 장관의 승인을 얻도록 했다.
이는 현행 ‘산업기술유출방지보호법’에 포함된 기술 유출 방지 조항을 더욱 강화해 핵심전략기술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현행법에는 국가로부터 R&D 지원을 받아 개발한 국가핵심기술이나 보유 기관을 매각 또는 이전할 때만 정부 승인을 얻도록 규정돼 있다. 그러나 이 경우 국가 지원을 받지 않은 기업이 외국 자본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기술 통제망을 더욱 촘촘하게 한 것이다.
당정은 전략 기술과 관련한 핵심 인력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이적 금지 계약’에 대한 법적 근거도 마련할 예정이다. 기업이 핵심 인력과 근로계약을 작성할 때 해외 경쟁사로 옮기는 것을 막기 위한 이적 금지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동안 반도체와 2차전지 업계에서는 회사와 근로자가 사적으로 이적 금지 계약을 맺더라도 헌법상 취업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사법부에서 무효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외에도 당정은 국가핵심전략기술을 유출할 경우 가중 처벌하는 내용을 법안에 담기로 했다. 민주당은 이달 말까지 법안 성안 작업을 마치고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이를 통과시킬 계획이다.
#유럽 신생 배터리 업체 A사는 최근 국내 배터리 대기업 B사의 연구원을 배터리와는 전혀 무관한 계열 컨설팅사로 영입을 시도했다. 경쟁 업체로의 ‘전직 금지 약정’에서 생기는 법적 분쟁을 회피하기 위해 일단 컨설팅사로 채용한 후 기술을 빼돌리려 한 것이다.
#지난 2018년 3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소재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한 C사 연구원들은 중국 경쟁업체에 기술을 넘겨주는 대가로 고액 연봉의 이직을 제안받았다. 이들 연구원들은 이미 서버 및 업무용 PC에 저장된 핵심 기술 자료를 중국업체에 제공한 상태였으나, 결국 첩보를 입수한 당국에 덜미가 잡혔다.
당정이 세제 지원을 중심으로 논의하던 국가핵심전략기술법에 ‘기술유출 방지’ 조항들을 추가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같은 기술 유출 사례를 방지하지 못한다면 기술개발 역시 ‘밑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중국이 해외에서 고급 인력을 유치하기 위한 천인계획(千人計劃)을 시행하는 등 인력 쟁탈전이 국제적으로 전개되자 업계에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터져나왔다.
당정은 국가핵심전략기술의 매각 또는 이전, 해당 회사의 인수합병 조건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핵심기술을 가진 연구원의 ‘이직 금지 계약’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등 기술·인재 유출 방지를 위해 총력을 다하겠다는 계획이다.
◇법망 속속 피해가는 고도의 기술유출...5년 간 111건 적발
우리 핵심 기술과 인력을 유출하기 위한 경쟁국과 경쟁업체들의 수법은 날이 갈수록 고도화되고 있다. 국정원에 따르면 2016년 1월부터 올 6월까지의 산업 기술 유출 적발 사건이 111건에 달한다. 이 가운데 국가 안보와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핵심 기술 유출 사건도 35건이나 됐다.
분야별로 보면 총 111건 가운데 반도체를 포함한 전기전자 분야 기술 유출이 41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디스플레이(17건), 조선(14건), 자동차(8건), 정보통신(8건), 기계(8건) 등이 뒤를 따랐다.
특히 ‘중국제조 2025’를 내세운 중국은 우리 기술·인재를 탈취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우리 반도체 기업인 ‘매그나칩’에 대한 인수 시도가 대표적이다. 중국계 사모펀드인 ‘와이즈로캐피털’은 지난 3월 매그나칩을 인수하기로 결정했으나, 현재 미국 정부에 의해 제동이 걸린 상태다. 미국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가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돼있는 매그나칩의 매각 작업 중지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제2 매그나칩 막자”…‘회계장부 열람권’ 통한 기술유출 방지도 검토
정부 여당이 국가핵심전략기술법을 통해 핵심전략기술의 매각 또는 이전, 기업의 인수합병 등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 역시 ‘제2의 매그나칩’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볼 수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매그나칩의 매각 소식이 알려진 뒤에야 뒤늦게 매그나칩이 보유한 OLED 구동칩(OLED DDI)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한 바 있다. 업계에서는 “OLED 구동칩 기술이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반응이 나왔다.
이에 당정은 매그나칩 매각과 같은 사례가 재발하지 않기 위해 반도체·2차전지·백신 전체를 국가핵심전략기술로 지정한 후, 국가 지원 여부와 관계 없이 매각 시 정부 승인을 받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반도체 특위 한 관계자는 “민간이 개발한 OLED 기술은 보호대상이 아니어서 중국이 구입을 추진했는데, 이같은 사례를 막자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당정은 소수주주의 회계장부 열람권을 통한 기술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대안도 검토하고 있다. 상법 상 회사 지분의 3% 이상을 가진 주주는 회계장부 열람권을 갖는다. 업계에서는 이를 통해 경쟁 업체나 해외펀드가 기술을 유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이다. 민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기술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외국인의 지분 취득에서부터 회계장부 열람권 등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논의 중”이라고 설명했다.
◇‘취업의 자유’에 ‘전직금지조항’ 막히자…법적 근거 마련
국가핵심전략기술을 가진 회사가 직원을 채용할 때 작성하는 ‘이직·전직 금지 약정’에 대한 법적 근거도 마련한다. 그간 업계에서는 회사가 핵심 기술 연구원들과 ‘전직 금지 약정’을 맺더라도 법정 공방으로 갈 경우 법원이 ‘직업 선택의 자유’를 들어 직원의 이직을 허용하거나 형량을 경감하는 경우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헌법상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 내부의 전직금지약정을 위반했다고 해도 실제 법원에서 이직 자체가 금지되는 판결이 나오기가 쉽지 않은 구조”라면서 “기업들이 기술과 인력들을 보호할 수 있는 보다 꼼꼼한 법 체계가 필요하다”고 토로했다.
이에 민주당은 해외 사례도 다각도로 검토하면서 다양한 해법을 모색한다는 계획이다. 민주당의 또 다른 핵심 관계자는 “이미 일본은 외국인에 대해 핵심 기술 연구 개발 참여 단계서부터 검증 단계를 거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현재 한국의 반도체와 배터리 등 핵심 기술에 대한 외국인 석박사 인력 상당수가 더 좋은 조건의 미국과 중국으로 가기 위해 한국 기업에 취업 노크를 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이에 대한 대비책도 준비중”이라고 강조했다.
G7 정상회의 참석차 영국을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영국 콘월 카비스베이 양자회담장 앞에서 참가국 정상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남아공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 , 문재인 대통령, 미국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두번째 줄 왼쪽부터 일본 스가 요시히데 총리,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 캐나다 쥐스탱 트뤼도 총리, 호주 스콧 모리슨 총리. 세번째 줄 왼쪽부터 UN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이탈리아 마리오 드라기 총리,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연합뉴스
전세계 주요 국가들은 중국의 기술 탈취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들을 도입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일본·대만 등은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첨단 기술의 매각·이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필요하다면 국가 원수가 직접 나서 기술 이전을 막기도 한다.
자유시보 등에 따르면 대만의 중국 본토 담당 기구인 대륙위원회(MAC)는 지난달 핵심기술 보호 등을 위한 양안(중국과 대만) 교류에 관한 근거 법령인 '대만지구와 대륙지구 인민관계조례'(양안 인민관계조례) 개정안을 공개했다.
개정안에는 △국방외교, 과학기술, 안보 관련자와 관련 업무를 위탁받은 개인 및 단체 △정부 기관의 지원 등을 받는 핵심기술 관련 종사자 및 단체 △정부의 위탁 및 지원이 끝났거나 이직 후 3년 미만인 자의 중국 방문 시에는 반드시 심사위원회의 심사와 허가를 받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이 명시됐다.
일본도 내년부터 유학생·외국인 연구자와 외국 정부 지원을 받는 일본인 연구자에게 군사 전용이 가능한 첨단 기술을 제공·연구하도록 할 때 이를 허가받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사실상 중국 등 해외로 첨단 기술이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영국은 국가 보안 및 투자법(National Security and INvestment Act)을 올해 말부터 시행한다. 이 법에 따르면 정부는 지분 변동(25% 이상)이 급격하게 늘어난 기업 중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만한 무역 정보, 데이터, 디자인 등과 관련된 투자나 거래가 있으면 이에 대해 조사하는 콜인(call-in) 권한을 갖게 된다.
영국 정부는 중국 자본의 영국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기업 인수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중국 윙테크가 소유한 네덜란드 반도체업체 넥스페리아의 영국 뉴포트웨이퍼팹(NWF) 인수를 전면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의회에 출석해 "우리나라 기업이 중국 계열 기업에 팔리게 되면 실질적인 안보 위협이 될지 등에 대해 조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2019 국방수권법’을 통해 기술보호를 목적으로 중국에 대한 무역·투자규제를 강화하는 법률들을 제정, 국가안보와 산업기술보호의 연계 강화 의지를 드러냈다. 특히 국방수권법에는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통신 및 영상감시 서비스·장비의 경우 중국 기업과 거래를 금지할 수 있는 규정도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