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보급에 정부가 과속 페달을 밟으면서 올 들어 지난 7월까지 ‘신재생에너지 공급 의무(RPS)’ 이행 비용이 전년 동기 대비 2배가량 늘며 2조 원을 넘어선 것으로 확인됐다. 전력 생산의 주요 연료인 석탄 가격이 1년 만에 3배 이상 뛰고 액화천연가스(LNG)도 같은 기간 30%가량 상승해 다음 달 4분기 전기요금 인상 압력은 한층 커지게 됐다. 하지만 정부가 내년 대선을 앞두고 ‘탈원전 책임론’ 등을 우려해 전기요금 인상을 계속 억누를 것이라는 관측도 적잖아 연료비연동제가 도입 1년도 되지 않아 파탄이 날 것이라는 관측이 확산될 것으로 전망된다.
22일 전력거래소가 매달 발표하는 연료원별 전력거래금액 통계에 따르면 올 1월부터 7개월간 RPS 이행 비용 정산금은 2조 260억 원으로 전년 동기(1조 346억 원) 대비 2배 가까이 늘었다. RPS는 설비용량 500㎿ 이상 발전 회사는 일정 비율 이상을 신재생에너지로 전력을 공급하도록 한 제도로 발전사는 ‘신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REC)’를 외부에서 구매해 RPS를 맞추고 있다. 발전사들이 RPS를 위해 지출한 비용은 전력거래소를 통해 청구돼 한전이 정산 후 비용을 지급한다. 한전은 관련 비용을 전기요금에 반영해 수익을 보전한다. 전력거래소의 한 관계자는 “RPS 비율이 지난해 7%에서 올해 8%로 상향된 데다 RPS 부담을 지는 발전사도 올해 추가로 늘어나 이행 비용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발전업계는 올 한 해 한전이 지급하는 RPS 비용이 지난해 대비 최소 1조 원 이상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윤영석 국민의힘 의원이 전력거래소에서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2019년 1조 8,690억 원 수준이던 RPS 정산액은 지난해 2조 9,472억 원으로 1조 원 이상 늘어나는 등 증가 추세가 가파르다.
특히 정부가 태양광 등 신재생 사업자들의 보조금 격인 REC의 고정 거래 가격을 시장 가격보다 높게 책정하고 발전사들의 REC 구매 부담 증가로 이어지는 RPS 상한선(10%→25%)도 높여 RPS와 관련한 전기요금 인상 폭은 향후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REC의 20년 장기 고정 거래 가격은 올해 1㎿h당 7만 1,947원 수준인 반면 이달 19일 기준 REC 현물 가격은 고정 거래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2만 9,714원에 불과하다. 정부는 지금처럼 REC 현물 가격이 낮게 형성되면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사업자들의 수익 보전이 어렵다고 보고 시장 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REC를 구매 중인 셈이다. 정부는 REC 현물 시장 비중을 더욱 축소해 장기 고정 거래 가격 중심으로 REC 시장을 개편한다는 방침이어서 RPS 관련 전기요금 인상 압박은 갈수록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전기요금은 이미 발전 연료 가격이 치솟아 인상이 불가피한 처지로 몰리고 있다. 호주 뉴캐슬 기준 전력용 연료탄 가격은 지난해 8월 중순 1톤당 49.52달러에서 이달 175.76달러로 3배 이상 껑충 뛰었으며 LNG 수입 가격은 지난해 7월 1톤당 383.4달러에서 지난달 497.2달러로 높아졌다. 한전의 전기요금 관련 산식에 적용되는 환산 계수를 100으로 놓았을 때 석탄 가격에는 69.5, LNG에는 29.6, 석유에는 0.7을 각각 곱해 연료비 조정 단가가 결정된다. 석탄 가격에 부여되는 환산 계수가 가장 높은 만큼 1년 사이 3배 이상 오른 석탄 가격은 이미 전기요금에 상당한 부담을 주고 있다.
한전 역시 연료 가격 상승 등으로 이미 대규모 손실을 보고 있어 전기요금 인상 요인을 흡수할 형편이 안 된다. 지난 2분기 한전은 7,648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데다 증권가에서는 올해 연간 영업손실이 1조 2,000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올 6월 정부는 3분기 전기요금을 동결하면서도 “하반기에도 현재와 같이 높은 연료비 수준이 유지되거나 연료비 상승 추세가 지속될 경우 4분기에는 연료비 변동분이 조정 단가에 반영되도록 검토할 예정”이라며 요금 인상 가능성을 시사하기는 했다.
하지만 탈원전으로 전기요금 인상 압력을 높여왔다는 여론의 비판에 시달려온 정부가 RPS 비용 급증과 연료비 상승 등 재무적 요인만을 고려해 다음 달 하순에 4분기 전기요금을 인상할지는 미지수다. 전기사업법에 따르면 전기요금 조정이 필요할 경우 한전은 산업통상자원부에 인가 신청을 해야 한다. 산업부는 물가 안정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소비자보호전문위원회 자문을 거쳐 기획재정부와 전기요금 조정 방안을 협의한 후 전기위원회에서 이를 심의한 뒤 한전에 요금을 통보한다. 결국 물가 상승 우려가 크거나 소비자 부담 증가 등이 예상될 경우 연료비가 상승하더라도 정부가 전기요금을 억누를 수 있는 셈이다.
내년 3월 대선은 전기요금 인상의 최대 변수로 꼽히기도 한다. 여권의 유력 대선 후보인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올해 여름은 코로나19 4차 유행으로 전기요금 인하 요구가 크다”며 추가적인 요금 인하를 압박하기도 했다. 청와대 역시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에 요금 인상 카드를 꺼내 들기가 쉽지 않다. 특히 전기요금을 올리면 ‘탈원전’에 따른 에너지 부족분을 값비싼 신재생으로 메웠다는 지적 속에 ‘정부의 무능’이 한층 부각되면서 전기요금 인상이 정가에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수도 있다.
에너지업계의 한 관계자는 “소비자의 합리적 에너지 소비를 장려하기 위해 도입된 연료비연동제가 대선 등 정무적 이슈로 사실상 용도 폐기될 상황에 놓였다”며 “4분기에도 전기요금 인상을 억누를 경우 탈원전에 대한 비판을 줄이기 위한 전기요금 분식회계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