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과 미국이 탄소국경세를 도입할 경우 우리나라 철강 등 탄소 다배출 업종은 매년 3,185억 원의 추가 비용을 내야 할 것으로 추산됐다. 국내에서 이미 탄소배출권거래제가 시행되고 있는데 탄소국경세까지 시행된다면 기업으로선 이중의 부담을 떠안게 된다.
28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EU는 2023년부터 탄소국경세를 도입할 예정이다. 탄소국경세는 탄소 배출량이 많은 나라에서 만든 상품을 수입할 때 수입업자에게 일종의 ‘징벌적 세금’을 매기는 게 골자다. 다만 수입국에서 배출권 가격을 지불했다면 세금에서 기지불금만큼 감면을 요청할 수 있다.
한국산 상품에 부과되는 세금은 한국과 EU의 탄소배출권 가격 차에 따라 결정될 전망이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올해 8월 기준 한국의 배출권 가격은 EU보다 6만 3,027원 더 낮다. 이를 철강과 알루미늄·시멘트 제조업의 연간 수출량과 연계해 추산하면 국내 업체가 부담해야 할 추가 비용은 연간 2,846억 7,000만 원에 달한다.
전 세계적인 탈탄소 흐름에 따라 미국에서도 탄소국경세 도입이 논의될 경우 국내 산업계의 부담은 더 불어날 수밖에 없다. 한국의 탄소배출권 가격은 미국(캘리포니아주 기준)보다 6,431원 낮아 국내 업체는 연간 338억 2,000만 원을 추가로 부담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EU에 이어 미국까지 탄소국경세를 도입하면 연간 3,185억 원의 비용을 내야 한다는 계산인데, 이는 현대제철이 지난 한 해 벌어들인 금액(730억 원)의 4배를 웃도는 수준이다.
국내에서 이미 탄소배출권제도가 운영되고 있는 데다 탄소세 도입까지 논의되고 있는 터라 제조업에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국내외 탄소 감축 압력이 커지고 있지만 감산하지 않는 이상 탄소 배출량을 조절하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다. 한국철강협회의 한 관계자는 “용광로에 투입하는 스크랩 비중을 높이는 생산 방식 등 신기술을 도입해 탄소 배출을 일부 줄일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한국 철강 업체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에너지 효율을 달성하고 있는 터라 감축 규모가 크지 않다”고 말했다. 철강 공정에서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인 기술로 평가되는 수소환원제철공법이나 탄소포집기술의 상용화는 2050년에나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기업 앞에는 생산 물량을 줄이거나 수천억 원의 탄소 배출 비용을 지불하는 양자택일의 선택지밖에 없는 셈이다.
다만 EU와 미국이 탄소국경세를 조기에 도입할지는 불분명하다는 시각도 있다. EU는 역내 탄소배출권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철강과 알루미늄 제조업에 대해선 100% 무상 할당을 적용하고 있다. EU가 자국 업체에는 탄소 배출을 허용하면서도 수입산 제품에 탄소 배출을 이유로 세금을 매긴다면 세계무역기구(WTO)가 규정한 내국민 대우(외국인을 자국민처럼 동등하게 대우) 원칙에 저촉될 소지가 높다. 이에 EU는 단계적으로 역내 무상 할당 몫을 줄이려 하지만 자국 산업계의 반발을 넘어설 수 있을지 미지수다. 물론 미국도 통상 시비에서 벗어나려면 수입 상품에 세금을 매기기에 앞서 국내 제품에도 동등한 수준의 부담을 지워야 한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미국 정부는 ‘러스트 벨트(미국 내 낡은 산업 지역)’의 표심에 민감한데 자국 제조업체의 반발을 무릅쓰고 탄소국경세를 시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 “다만 탄소 배출을 이유로 수입품에 상계관세를 매기는 우회 전략을 꺼내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