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의 어느 평온한 아침, 출근 준비에 나선 직장인 김태평(가상 인물) 씨는 여느 때처럼 스마트폰을 켜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위치 추적 애플리케이션으로 당일 출장 지역까지의 경로와 교통편을 파악한 그는 e메일로 업무 준비 자료를 내려받은 뒤 전자레인지로 데운 레토르트로 빈 속을 달랜다. 출장지행 열차에 탑승한 후 무료함을 달래려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뉴스 사이트에서는 내년도 국방 연구개발(R&D) 예산이 30조 원에 육박해 사상 최대라는 기사가 떴다. 김 씨는 ‘내수도 안 좋은데 복지에나 돈을 좀 쓰지’라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정부가 최근 수년 새 국방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를 늘리면서 가상 인물 김 씨와 같은 생각을 하는 시민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김 씨가 간과한 것이 있다. 그의 일생 곳곳을 지탱한 것은 국방에서 파생된 첨단 기술이라는 점이다. 위치 추적 앱의 기반이 되는 GPS와 e메일 등 온라인 서비스의 기반이 된 인터넷은 과거 미국이 개발한 국방 기술을 민간용으로 개방해 가능해진 서비스다. 전자레인지는 미국 기업 레이시언사의 레이더 관련 기술 연구 중 우연히 탄생한 것이다. 레토르트도 군용식 기술이 상용화돼 일상화됐다.
이 같은 국방 과학기술의 민간 상용화는 먼 나라의 일이 아니다. 우리 정부와 군 당국도 국방 R&D를 방위산업 등 특수한 분야에만 국한하지 않고 민간 경제에도 이바지할 수 있도록 ‘민군 겸용 기술’을 개발하는 작업에 시동을 걸고 있다.
◇액셀 밟는 ‘민수사업화’=우리나라가 국방 기술 민수화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 것은 지난 1990년대 중반부터다. 1991년 국방산업민수전환법을 제정한 미국의 사례와 1992년 군수산업민수전환법을 만든 러시아의 사례를 우리 정부가 빠르게 벤치마킹해 국방 기술을 민간에 이전하는 이른바 ‘스핀오프(spin-off)’ 활성화에 나섰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1995년 관계 부처 합동으로 ‘민군 겸용 기술 개발 공동관리 규정’을 제정했고 1998년에는 ‘민군겸용기술사업촉진법’을 제정했다. 1999년부터 5년 동안 민군 규격을 통일하고, 민간으로의 기술이전 및 민군 겸용 기술 개발을 본격화했다. 2014년에는 민수사업화를 전담하는 본부급 조직인 ‘민군협력진흥원’이 국방과학연구소(ADD) 산하에 신설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관련 사업의 예산 배정이 크게 늘었다. 정부가 편성했던 민군 기술협력 사업은 올해 처음으로 2,000억 원을 돌파(2,059억 원)해 지난해 대비 15.6%나 늘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에 따르면 2010~2015년 실시된 237건의 기술이전 사업은 총 9조 3,519억 원의 직간접적 경제 효과를 낸 것으로 분석됐다. 그중 매출 효과만도 3조 5,000억 원에 이르며 고용 효과는 4만 6,000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후 기술이전 사업이 더 활성화된 것을 감안할 때 현재의 경제 효과는 더 증대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술 주고 자금도 조달해주고"…‘사업 전 주기’ 기업 지원=한국군사과학기술학회(KIMST)가 11일부터 이틀간 연 2021년도 종합 학술대회에서도 ‘국방 기술의 민수사업화를 통한 국가 경제발전’을 주제로 특별 세션이 마련됐다. 주제발표에 나선 신상훈 민군협력진흥원 부장은 “근래에 ADD는 매년 500여 건씩의 특허를 내고 있다”며 “이 같은 국방 기술을 민간이 활용할 수 있도록 기술이전 등을 통해 민수사업화를 진행하겠다”고 소개했다. 그런 차원에서 “국방 기술 이전 상용화 지원 사업(가칭)을 추진하고 있다”며 “이를 통해 기술을 이전받은 기업이 상용 기술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정책 자금 등을 지원하고 있으며, 해당 기업이 기술을 완성해 매출을 발생시킬 때까지 견딜 수 있게 민간펀드·공모펀드를 연결해 자금 조달을 돕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ADD는 오는 2022년에는 국방 기술 민수화사업을 한층 확대해 15개 과제에 착수할 예정이다. 여기에는 군사용 무인지상차량(UGV) 기술을 활용한 ‘다목적 작업용 지원용 다축 자율주행 플랫폼’, 코로나19 방역 등에 활용할 수 있는 ‘보급형 휴대용 생물 입자 실시간 검출 감지기’ 등이 포함돼 있다.
◇수십 년 개발 격차 딛고 세계 최고 기술 기업 키워=ADD의 기술이전 성공 사례 중 대표적인 것이 적외선 검출기다. 사물에서 발생하는 열을 감지해 영상으로 보여줌으로써 빛이 없는 어두운 환경에서도 사물을 식별하게 해주는 기술이다. 국산 적외선 검출기 개발은 선진국보다 수십 년 늦은 1980년대 말 ADD의 주관하에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실시했다. 그 결과 1990년대 후반에 선형 적외선 검출기 기술 개발에 성공했고 관련 KAIST 연구 인력이 1998년 센서 기술 전문 기업인 ‘아이쓰리시스템(i3 system)’을 창업했다.
아이쓰리시스템은 ADD 등의 지원으로 국방 기술을 이전받은 결과 2009년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적외선 검출기 국산화에 성공했다. 또한 해당 적외선 검출기를 민수용으로도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으며 파생 제품으로 적외선 카메라, X레이 센서 등을 개발할 수 있었다. 이 회사의 김병혁 전무는 “(ADD로부터 적외선 검출기 관련 기술 등을 비롯해) 총 11건의 기술을 이전받았는데 이를 사업화한 결과 군수 분야에서는 약 500억 원의 누적 매출을 달성하고 민수용 적외선 검출기 매출 분야에서는 1,000억 원 이상의 누적 매출을 기록했다”고 전했다. 또한 “(민수용 적외선 카메라 등) 파생 상품 매출도 누적 700억 원에 이르렀다”며 “지난해부터는 민수 수출 매출이 국내 방산 시장에서의 매출 실적을 넘어섰다”고 전했다.
이 회사가 현재 판매 중인 적외선 검출기는 냉각형의 경우 10㎛피치, 비냉각형의 경우 12㎛피치급의 해상도를 내는데 이는 세계 선두인 프랑스·이스라엘과 동등한 수준이다.
◇향후 과제는 남아=국방 기술 민수사업화의 활성화를 위한 과제는 아직 남았다. 특별 세션 발제에 나선 STEPI의 손수정 박사는 “일반적으로 R&D는 중요하고 이를 통한 경제성장은 중요한데, 그 사이를 연결하는 기술사업화는 당연히 이뤄지는 것이라고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기술사업화는 3,000개의 아이디어가 있으면 겨우 1개가 성공할 정도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김도경 KAIST 교수는 “최근 연구 결과들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혁신적인) 특허들이 실제 상용화돼 (사업화에) 성공하기까지는 평균 7~9년 정도 걸린다”며 “KAIST도 7년까지는 기관에서 (발명자에 대한 사업) 유지비를 지원하지만 그 이상의 기간은 발명자가 스스로 지탱해야 해 그 순간에 많은 교수님들이 특허 유지를 포기하고 특허 사냥꾼들에게 특허를 헐값에 넘기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따라서 사업화가 성공할 수 있기까지 기술을 이전받은 민간이 사업 리스크와 비용을 감내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과 민간 밴처캐피털 등과의 연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도윤희 방위사업청 방산일자리과장은 “국방 기술을 민간에 이전할 때는 그 기술이 어디에 쓰일 수 있는지에 대한 활용성이 중요하고, 이전받는 기업의 역량에 대한 평가도 중요하다”며 “이를 (정부가) 정확히 파악해 이전해줄 국방 기술과 이전받을 민간 기업을 적절히 매칭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