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라이프

[休] 빛바랜 빛고을, 예술로 밝히다

■광주 구도심 동구 재생 '폴리 투어'

유명 건축·예술가, 숨겨놓듯 곳곳 조형물 31개 설치

5·18 민주화운동 흔적 예술로 승화…예향도시 재건

전일빌딩245에서 내려다본 광주 동구 일대. 바로 앞은 옛 전남도청 청사이고 그 뒤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지하에 자리 잡고 있다.전일빌딩245에서 내려다본 광주 동구 일대. 바로 앞은 옛 전남도청 청사이고 그 뒤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지하에 자리 잡고 있다.




전라남도 광주 동구 제봉로 82번길. 광주 최초의 근대식 공립소학교 서석초등학교 앞을 지나는 이 길은 동구청과 동명동 카페거리를 오가는 길이 110m의 보행자 전용로다. 지난 2017년 차량 진입 여부를 놓고 오랜 기간 진통을 겪어온 이곳에 ‘서울로 7017’을 설계한 네덜란드 건축가 위니 마스의 폴리(Folly) ‘아이 러브 스트리트(THE I LOVE STREET)’가 들어섰다.



작가는 길바닥에 새겨진 알파벳 ‘I LOVE’를 각각 나무와 잔디, 트램펄린, 음악분수로 채워 넣었고 ‘E’ 옆에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대형 칠판을 설치했다. 작품 시작점에 놓인 노란색 계단은 전망대이자 시민들을 위한 쉼터다. 계단 위로 올라서면 바닥의 글씨가 한눈에 들어오고 교문 안팎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작가와 서석초등학교 학생들이 협업한 결과물이다.

‘아이 러브 스트리트’는 2011년부터 도시재생 사업으로 추진 중인 ‘광주폴리’ 프로젝트의 일부다. 폴리란 낙후된 구도심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의도로 설치한 일종의 조형물이다. 프랑스 파리의 라 빌레트 공원이 현대적 폴리의 출발이 됐다. 폴리가 들어선 후 이 길은 아이들에게는 놀이터로, 광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인기 포토존으로 명소가 됐다.
지금까지 광주에 설치된 폴리는 총 31개. 아이 러브 스트리트처럼 도심 보행로 한복판에 세워진 경우도 있고 시민들이 밟고 다니는 콘크리트 바닥이나 지하철 내부, 공중화장실이 작품 활동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폴리는 광주 시민들의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 하듯 도심 곳곳에 숨겨진 폴리를 찾아 광주를 다녀왔다. 건축 기행처럼 폴리를 따라 여행하는 이른바 ‘폴리 투어’다.

광주 톨게이트 위에 설치된 조형물은 가장 최근에 설치된 관문형 폴리 ‘무등의 빛’이다. 서울 방면으로 바라본 모습. /사진 제공=광주비엔날레광주 톨게이트 위에 설치된 조형물은 가장 최근에 설치된 관문형 폴리 ‘무등의 빛’이다. 서울 방면으로 바라본 모습. /사진 제공=광주비엔날레


사라진 성곽의 흔적 따라…도시를 디자인하다



여행의 출발은 광주읍성이 있던 구도심 동구다. 국내외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참여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중심으로 총 11개의 폴리가 설치됐다. 광주읍성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을 따라 폴리를 세워 역사성을 회복하고 구도심의 활력을 되찾자는 취지다.

광주 전역에 설치된 폴리. 사진은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꿈 집’, ‘뷰폴리&설치작품 “자율건축”’, ‘소통의 오두막’ ‘열린 공간’ ‘열린 장벽’./사진제공=광주비엔날레광주 전역에 설치된 폴리. 사진은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꿈 집’, ‘뷰폴리&설치작품 “자율건축”’, ‘소통의 오두막’ ‘열린 공간’ ‘열린 장벽’./사진제공=광주비엔날레


처음으로 만나볼 작품은 ‘소통의 오두막’. 스페인 건축가 후안 에레로스는 장동로터리의 교통섬을 매력적인 공원으로 바꿔놓았다. 한국의 정원 소쇄원과 한옥의 굴뚝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는 나무 윤곽이 갖고 있는 패턴을 차용해 가로수 사이에 유기적 형태의 조형물을 선보였다. 작품은 낮에는 도시의 개성을 드러내는 조형물, 밤에는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을 비추는 조명 역할을 하며 시민들의 작은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뷰폴리&설치작품 “자율건축”’을 방문한 관람객이 회전형 광고판 ‘체인지(CHANGE)’를 돌려보고 있다.‘뷰폴리&설치작품 “자율건축”’을 방문한 관람객이 회전형 광고판 ‘체인지(CHANGE)’를 돌려보고 있다.


광주영상복합문화관 옥상에 설치된 ‘뷰폴리&설치작품 “자율건축”’은 전망대 폴리다. 마치 브랜드 광고처럼 보이는 ‘체인지(CHANGE)’라고 쓰인 구조물이 바로 폴리다. 손으로 돌릴 수 있는 회전형 광고판은 어떤 방향으로 돌려도 색깔만 바뀔 뿐 ‘체인지’라는 문구를 유지한다. 그 뒤로는 분홍색과 노란색 스트라이프로 장식한 철골 구조물이 설치돼 있고 작품 안쪽을 통과하면 앉아서 무등산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다. 하나로 연결된 2개의 구조물은 한국 건축가 문훈과 독일의 미디어 아트 그룹 리얼리티즈 유나이티드의 팀 에들러&얀 에들러가 공동으로 작업했다.

‘뷰폴리&설치작품 “자율건축”’ 전망대에서 한 관람객이 무등산을 바라보고 있다.‘뷰폴리&설치작품 “자율건축”’ 전망대에서 한 관람객이 무등산을 바라보고 있다.


광주 서석로 7번길 한복판에 설치된 ‘기억의 현재화’는 광주 시민들조차 폴리인지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건축가 조성룡은 보행로에 설치된 맨홀 뚜껑 모양의 야트막한 콘크리트 언덕 모양 작품을 통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한 번쯤 속도를 늦추고 광주읍성의 역사와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라는 의미를 전하고 있다.

인근 서남동 구시청사거리에는 유독 눈에 띄는 폴리가 세워져 있다. 포장마차를 본떠 만들어진 노란색 구조물로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의 작품 ‘열린 공간’이다. 작품이 설치된 장소는 옛 광주시청이 있던 곳으로 일상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런가 하면 옛 한정식집을 모티브로 한옥 건물을 리모델링한 음식점 쿡폴리도 있다. ‘청미장’은 한국전쟁 이후 동구 황금동 뒷골목 초가집에서 교자상 메뉴로 이름을 떨치던 한정식집 이름이다. 청미장을 따라 주변에 한정식집이 잇따라 생겨났고 광주가 맛의 고장이라는 명성도 얻게 됐다. 장진우 셰프가 참여한 ‘청미장’은 광주의 옛 풍경을 기억하기 위해 1970년에 지어진 낡은 한옥을 리모델링했다. 현재 광주청년조합이 음식점으로 운영하고 있다.



광주폴리는 설치 시기에 따라 ‘광주의 문화 풍경(11개)’ ‘폴리의 유형학 재정립(8개)’ ‘도시의 일상성 맛과 멋(11개)’ ‘공간 개입의 잠재력 맥락화(1개)’ 등 4개 주제로 나뉘어 있다. 광주 전역에 분산해 있지만 광주 톨게이트에 설치된 ‘무등의 빛’과 서구 아시아창작스튜디오에 설치된 ‘다이크로닉 웨이브: 빛과 바람의 대화’ 등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구도심 동구에 집중적으로 설치됐다.

관련기사



길 가다 우연히 만나기는 쉽지만 작정하고 폴리만 찾아 나선다면 꼬박 하루를 투자해야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광주폴리 홈페이지에 나온 폴리 지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상세 지도가 아니라 찾기 쉽지 않지만 덕분에 광주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광주 지리도 익힐 수 있다. 광주교육대학원 수학 교사들이 학생들을 위해 개발한 ‘광주폴리매쓰투어’ 애플리케이션을 따라 문제를 풀면서 폴리를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문화창조원 복합 3·4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포스트휴먼 앙상블’을 찾은 한 관람객이 루카스 실라버스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문화창조원 복합 3·4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포스트휴먼 앙상블’을 찾은 한 관람객이 루카스 실라버스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서울에 인사동 거리가 있다면 광주엔 예술의 거리가



예향(藝鄕)의 도시 광주의 상징은 동구 예술의 거리다. 1987년 예술의 거리로 공식 지정된 이곳은 화랑, 골동품 가게, 필방, 소극장 등이 집결해 있다. 코로나19로 2년 가까이 멈춰 있던 예술의 거리도 단계적 일상 회복으로 조금씩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을 찾은 관람객들이 김설아 작가의 ‘아홉 개의 검은 구멍, 숨소리’를 감상하고 있다. ACC는 오는 2022년 2월까지 문화창조원 복합 3·4관에서 전시 ‘포스트휴먼 앙상블’을 개최한다.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을 찾은 관람객들이 김설아 작가의 ‘아홉 개의 검은 구멍, 숨소리’를 감상하고 있다. ACC는 오는 2022년 2월까지 문화창조원 복합 3·4관에서 전시 ‘포스트휴먼 앙상블’을 개최한다.


대표적인 곳이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다. 옛 전라남도 청사 뒤편에 세워진 문화전당은 연면적 16만 1,237㎡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예술의전당보다 클 뿐만 아니라 아시아 문화·예술 기관 가운데 최대 규모다. 건물을 모두 지하에 몰아넣은 대신 지상은 녹지 공간으로 조성했다. 덕분에 일대에 무등산 조망권이 확보됐다.

옛 전남도청 자리에 들어선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은 지하로 내려가야 만나볼 수 있다. 대신 지상은 녹지 공간으로 남겨뒀다.옛 전남도청 자리에 들어선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은 지하로 내려가야 만나볼 수 있다. 대신 지상은 녹지 공간으로 남겨뒀다.


민주평화교류원과 문화정보원·문화창조원·예술극장·어린이문화원으로 구성된 문화전당 전체를 모두 둘러보려면 반나절은 걸릴 정도로 규모가 크다. 입장료가 없기 때문에 여유를 갖고 공연이나 전시 등 하나의 주제에 집중해서 관람하는 게 좋다. ‘ACC 민주평화교류 권역 투어’를 신청하면 전문 해설사와 함께 문화전당 야외 권역을 산책하며 아시아 각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최고층 건물이던 전일빌딩은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 새 단장했다. 이혜경 작가의 설치미술 작품 ‘민주의 탄환’.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최고층 건물이던 전일빌딩은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 새 단장했다. 이혜경 작가의 설치미술 작품 ‘민주의 탄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을 둘러보는 것도 광주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 문화전당 주변은 5·18민주화운동의 현장이다. 걸어서 2~3분 거리에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으로 245개의 탄흔이 발견된 전일빌딩245와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등이 모여 있다. 전일빌딩245는 철거를 앞두고 창고로 쓰이던 10층에서 탄흔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기념관으로 남게 됐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탄흔뿐 아니라 5·18 관련 사진과 디오라마 등을 만나볼 수 있다.

비움박물관에는 3만여 점의 수집품 가운데 1만여 점이 전시돼 있다. 나머지 2만여 점은 기획 전시 등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비움박물관에는 3만여 점의 수집품 가운데 1만여 점이 전시돼 있다. 나머지 2만여 점은 기획 전시 등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예술의거리 끝자락 비움미술관은 사라져가는 광주의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이다. 전북 순창 출신인 이영화(74) 관장이 50년간 수집한 생활용품 3만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처음에는 버려진 물건들을 줍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돈을 주고 사서 모은 것이 창고를 가득 채우고 남을 정도로 방대한 규모가 되면서 민속 분야 국내 최대 규모 컬렉션으로 발전했다.

이영화 비움박물관 관장이 밥사발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물관이 소장한 밥사발만 수백 점에 달한다.이영화 비움박물관 관장이 밥사발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물관이 소장한 밥사발만 수백 점에 달한다.


시골집 대청마루에 놓였던 쌀 뒤주, 살강, 꿀단지, 밥사발, 무쇠솥 같은 부엌 세간부터 밭에서 쟁기질할 때 쓰던 흙발, 신생아에게 입히던 배냇저고리, 상여 꼭두까지 누군가에게는 추억이고 누군가에는 생소한 물건들이다. 전시품들은 관람객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박물관을 꽉 채우고 있다. 선조들의 손때 묻은 흔적을 가까이서 만나볼 수 있다.



글·사진(광주)=최성욱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