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은행과 자산운용사 등이 미국 펀드 투자자들로부터 거액의 손해배상 집단소송을 당했다. ‘제2 라임사태’로 불리는 디스커버리자산운용의 펀드 환매 사태를 빌미로 미국 자산운용사 DLI에서 운영하는 특수목적법인(SPV)인 DL글로벌사(DLG)가 발행한 사모사채 투자 피해와 관련해 미국 현지 기업과 투자자들이 국내 금융사들을 상대로 2,000억 원대의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29일 서울경제가 단독 입수한 미 캘리포니아주 중부 연방지방법원에 접수된 고소장에 따르면 미국 소재 DLI 애세츠 브라보 LLC(DLIB)’ 등 10여개 기업과 투자자들이 신한은행·KB국민은행·증권금융·골든브릿지자산운용·JB자산운용·한국대안투자자산운용 등 국내 6개 금융회사를 상대로 DLI에서 취득한 부당한 수익을 투자자들에게 되돌려줘야 한다는 내용의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확인됐다. 손해배상 금액만 1억 9,841만 달러(약 2,369억 원)에 달한다. 소송은 지난 23일(현지 시간) 접수됐다.
이 소송에 정통한 미국 현지 변호사는 “이번 집단소송은 지난해 디스커버리자산운용이 ‘US핀테크펀드’ 판매로 모은 펀드 자금을 펀드 가치와 수익률을 부풀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증권법령 위반 혐의로 소송 당한 미국 자산운용사 DLI와 계약해 운용하다 발생한 환매 사태와 유사한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소장에는 신한·국민·증권금융이 수탁을 맡아 수익을 챙겼고 골든브릿지자산운용과 JB자산운용·한국대안투자자산운용은 판매·운용해 대규모 손실을 유발한 만큼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적시돼 있다. 이에 현지 기업들과 투자자들에게 적절한 피해 보상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돼 2,000억 원 규모의 집단소송을 시작하면서 현지 언론들도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집단소송은 디스커버리자산운용의 펀드 환매 중단 사태와 관련한 SEC의 소송에 따른 재판과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DLI 최고경영자(CEO)이자 대표인 브렌던 로스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으로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는 것이 미 캘리포니아주 현지 법조계의 평가다.
골든브릿지자산운용과 JB자산운용·한국대안투자자산운용 등이 판매해 소송 대상이 된 33개 펀드는 사실 2013년부터 미국 현지에서 판매했던 상품으로 미국 중소 상공인에게 대출하는 간접 펀드다. 중간에 핀테크 회사인 렌딩 플랫폼 업체가 낀 점은 디스커버리자산운용의 운용 방식과 유사하다. 렌딩 플랫폼을 통해 다수의 차주에게 대출을 해주고 이 대출 채권을 기초로 미국 금융회사들이 펀드를 만들어 미국 인컴펀드인 ‘다이렉트렌딩펀드’와 ‘프라임메르디안펀드’에 재간접투자한다. 그러므로 국내 투자자는 간접투자를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판매될 때 목표 수익률을 7%대로 잡아 현지 고액 자산가들이 주로 투자했다. 국내에서도 두 펀드 모두 최소 가입 한도가 1억 원 이상이라 서울 강남 지역 PB센터를 통해 투자자를 집중적으로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글로벌 경기 악화와 미국 경기 침체로 DLI사가 펀드 부실화를 초래하며 현지는 물론 국내 투자자들도 막대한 손실을 본 것이다.
국내 증권 업계 관계자는 “생소한 미국 소상공인 대출 펀드에 가입한 국내외 투자자들은 7% 고수익 매력에 투자했지만 결국 펀드 부실화로 현지에서 많은 개인투자자들이 엄청난 손실을 봐 논란이 일었던 것으로 안다”며 “디스커버리자산운용 사태를 빌미로 DLI사가 미국 법원으로부터 투자자들의 피해 복구 명령을 받으면서 현지 피해자들이 집단소송에 나선 것 같다”고 했다.
현지의 한 미국 변호사는 “신한은행과 국민은행·한국증권금융이 투자 구조를 사전에 심사하고 철저하게 감시 업무를 했다면 부실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원리금 회수에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라며 “오히려 자사의 수수료와 관련 펀드 판매로 생긴 수익을 챙기는 바람에 도덕적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주목할 점은 현지 피해자들이 외국계 금융사를 상대로 이번 집단소송을 진행하는 만큼 국내 금융사들에는 불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신한·국민·증권금융·골든브릿지자산운용·JB자산운용·한국대안투자자산운용 등이 2,000억 원대의 피해 보상액을 모두 지급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번 집단소송은 디스커버리자산운용의 펀드 환매 중단 사태처럼 ‘US핀테크글로벌채권펀드’ 판매사인 하나은행·기업은행·한국투자증권·하나금융투자 등을 상대로 법적 소송을 벌이는 점에서 유사한 사건이다.
다만 국내 소송의 쟁점은 펀드 투자 대상에 대한 환매 유예와 디폴트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국내 판매사들이 이를 숨긴 채 펀드 판매를 강행한 점이다. 반면 이번 소송의 경우 미국 현지에서 판매 전에 상품의 위험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으나 이를 무시하고 판매를 강행한 것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또 지난해 4월 DLI가 실제 수익률과 투자 자산의 실제 가치 등을 허위 보고한 행위가 적발돼 SEC에 고발되고 수사와 재판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수수료 수익과 펀드 판매 수익이 부풀려져 결국 DLI의 수익으로 전가된 것으로 드러나 이를 피해 투자자들에게 되돌려줘야 한다고 법원이 판결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국내의 한 대형 로펌 파트너 변호사는 “미국 현지에서 벌어진 피해 보상 소송이라는 점에서 당사자인 국내 금융기관들에는 더 불리할 수 있다”며 “미국 법원은 금융 사기 성격의 사건인 경우 피해자가 최우선으로 구제받을 수 있도록 판결하는 관례가 있어 이번 소송이 미국발 대규모 피해 보상의 첫 사건이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한국증권금융 관계자는 “소장이 아직 본사에 접수되지 않아 정확한 피해 요구를 알 수 없다”며 “이번 집단소송과 관련한 현지 투자자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이미 펀드 청산을 통해 상환을 마쳐 책임이 없다”고 설명했다. KB국민은행 측은 “이번 집단소송과 관련해 현지에서 피해 사실이 유발된 적이 없다”면서도 “일단 사실 파악을 해보겠다”고 답했다. 반면 신한은행 측은 이번 집단소송 관련 취재에 대해 답변조차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