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정책

가이드라인 없는데 자문비만 1억…'레몬마켓' 된 ESG 컨설팅

['ESG 공시 의무화'에 고달픈 기업들]

공시 기준 모호한데 컨설팅 받다보니 비용은 '깜깜이'

'턴키 계약' 관행 만연, 보고서 인증 신뢰성도 떨어져

"정부, 모범 작성안·사례 등 제공…시장 왜곡 막아야"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컨설팅·인증 업계는 ESG 공시와 함께 성장한 시장으로 꼽힌다. 컨설팅 단위에서는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공시하려는 기업들에 보고서 작성 방법을 알려주거나 이를 대행하는 역할을 한다. 지속가능경영 보고서의 ‘신뢰성’을 보장해주는 제3자 검증 업무 역시 활황을 띠고 있다. 대형 회계법인이나 한국경영인증원·한국생산성본부·로이드인증원 등 컨설팅 기관들이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그러나 기업·학계 안팎에서는 이 같은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컨설팅·인증 시장이 최근 질 낮은 상품만 모인 ‘레몬마켓’으로 변질됐다고 지적한다. 아직 ESG 공시 표준·제도가 명확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공시 수요만 폭발하다 보니 가뜩이나 낮았던 가격 투명성이 더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정부의 제도 정비 등을 통해 보다 명확한 ESG 공시 가이드라인을 제공해 이 같은 시장 왜곡을 방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정작 정부에서는 ESG 공시 규제 생산에 더 몰두하는 모습이라 오히려 기업들의 요구에 역행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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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한국상장회사협의회의 ‘ESG 정보 공개 의무화 관련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작성을 위해 체계 구축, 작성 대행 컨설팅 및 제3자 검증 명목으로 지출한 총비용은 평균 8,659만 원(32개 사 기준)으로 나타났다. 평균 인증 비용은 1,490만 원(29개 사 기준)으로 집계됐다. 국내 상장사의 ESG 컨설팅·인증 비용 통계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간 ESG 공시 컨설팅·인증 명목으로 1억 원 이상을 지출한 곳은 응답 기업의 50%(16곳)에 달했다. 자산 규모 2조 원 이상 기업의 경우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컨설팅·인증 평균 비용이 9,299만 원에 달했다.

오는 2025년부터 일정 규모 이상의 코스피 상장사에 대해서는 ESG 공시가 의무화되면서 ESG 컨설팅·인증 비용이 상승했다는 전언이다. 지난 11월 국제회계기준(IFRS) 재단이 글로벌 ESG 표준을 수립할 국제지속가능성기준심의위원회(ISSB) 설립을 발표한 것도 각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작성에 발동을 걸었다. 한 금융사의 ESG 담당 부서장은 “과거에는 컨설팅 관련 업체 10곳이 100개 사를 다뤘다고 하면, 지금은 이들이 200개 사를 담당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정작 제대로 된 비용 정보를 파악하기도 어렵다. A 회계법인 임원은 “한 대기업 계열 금융사는 800만 원에 인증을 맡겼다고 하는데 다른 대기업은 1,500만 원에 수주했다는 곳도 있었다”고 귀띔했다. 애초에 국제적으로 명확한 ESG 공시 기준이 마련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컨설팅을 하다 보니 ‘투자자에게 유용한 비재무 정보를 제공한다’는 본취지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라는 얘기다.

ESG 컨설팅 업계에 만연한 ‘턴키’ 관행으로 인해 보고서 인증 신뢰성도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턴키란 보고서 작성 컨설팅 업체들이 다른 컨설팅사에 인증 업무 등의 ‘하청’을 주는 것을 말한다. 재무제표로 치면 재무 컨설팅을 하는 회계법인이 다른 회계법인에 감사 의견을 달라고 일감을 주는 셈이다. 자체적인 윤리 기준을 가진 대형 회계법인들보다는 일반 컨설팅사를 중심으로 턴키 관행이 강하다는 전언이다. 한 회계 업계 관계자는 “돈을 조금만 받고 보고서 도장만 찍어주는 관행이 만연해 회계법인 입장에서는 참여하기 힘들다”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시장 왜곡이 결국에는 공시 제도 ‘공백’에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기업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컨설팅 용역을 맡기는 것은 어떻게 공시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ISSB에서도 내년에나 ESG 공시 기준 초본을 내놓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이다. 근본적으로는 이 같은 혼선이 제도 도입 극초반 단계에서 불가피할 수밖에 없는 만큼 ESG 공시 관행 성숙을 위해 기업 자체적으로 공시 역량을 키우는 쪽으로 정부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다. 한 상장사의 ESG 담당자는 “공시 의무화 논의와 함께 작성 기준 및 모범 사례 등에 관한 자료 공유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를 위해서는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등으로 ESG 정보가 일원화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통일된 기준 없이 각 부처별로 ESG 정보 규제만 생산하고 있어 이에 역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령 환경부는 내년부터 자산 규모 2조 원 이상의 상장사에 환경 정보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한 환경기술산업법 시행령을 개정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정보 보호 최고책임자를 둔 연 매출 3,000억 원 이상 상장사에 정보 보호 관련 주요 사항을 공시하도록 정보보호산업법 시행령을 바꿨다.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ESG에 대한 내용이 재무제표에 들어가도록 개정하는 것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채널에서 공시를 의무화하게 되면 기업 입장에서는 ESG 공시 실무 부담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상호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개별법으로 정보 공개 의무를 부과하게 되면 ESG 정보가 산발적으로 공시될 수밖에 없어 정보 이용자 입장에서도 접근성이 떨어지고 기업 부담도 커질 것”이라며 “기업 공시 쪽은 금융위원회 소관으로 규정하는 것이 일관성 측면에서는 맞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심우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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