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패권 전쟁의 본질은 과학기술 전쟁 아닙니까. 차기 정부에서는 글로벌 경험과 네트워크가 풍부한 기업인 출신
을 실리콘밸리에 과학기술 대사로 두는 게 효과적입니다.”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장은 2일 서울경제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워싱턴DC에 주미 대사가 있고 샌프란시스코에도 총영사가 있지만 한미 과학기술 동맹을 맺는 역할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몇 년 전 기업가 출신의 캐스퍼 클린지 전 덴마크 기술 대사와의 식사 경험을 소개하며 “실리콘밸리 기술 기업들과 기술 혁신, 투자, 사이버 안전과 보안 등에 협력을 하고 있더라”고 전했다.
신 소장은 “한국에서 한국판 실리콘 밸리를 만들겠다고 하면서도 현직 대통령이 실리콘밸리를 방문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일할 것”이라며 “차기 대통령이 실리콘밸리의 전쟁터를 와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미중 패권 전쟁의 분석과 전망은.
△본질은 과학기술 전쟁이라 타협이 안 돼 오래 지속될 것이다. 바이든 미 행정부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때보다 중국에 집중하고 신장 위구르 인권 탄압과 대만 문제를 얘기하지만 다분히 국제 여론용이다. 한국·일본·호주 등 아시아와 유럽까지 퍼진 반중 정서를 바탕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기존 패권국과 신흥 강대국이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투기디데스 함정이라는 말도 있는데 미중 간 신냉전기 양상인데.
△과거 미국과 소련 간 냉전기에 비하면 복잡하고 중첩된 관계이다. 글로벌 톱10 기업 중 구글·애플 등 8개가 미국 기업이고 2개가 중국 기업이다. 미국은 이것을 지켜야 한다. 양보할 수 없다. 미중 패권 전쟁은 긴박한 상황이다.
-트럼프 때부터 미국에서 중국으로 과학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여러 조치를 했는데 어떻게 되고 있나.
△한국에서 느끼는 것보다 훨씬 급박하게 돌아가고 심각하다. 이공계와 의료 쪽에 대한 정부의 조치가 강화되고 있다. 특히 중국계 과학기술인들의 불안감이 크다. 아마 미국 정부에서 조사받은 경우가 몇 백 명은 될 것이다.
-중국의 인재 유치 전략인 ‘천인계획’ 참여를 숨겼던 찰스 리버 하버드대 교수도 유죄 판결이 났는데.
△연구자가 국립보건원(NIH)나 국립과학재단(NSF) 등 연방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을 경우 중국과 관련한 협력 사실을 보고해야 한다. 최근 연구자들이 중국 대학 등에서 같이하자고 하면 꺼리는 경향이 있다. 제가 돕는 실리콘밸리의 수소연료전지·수전해 핵심 소재 개발사에도 중국과 사업을 같이하지 말라고 권유했다. 잘못되면 타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의 연구개발(R&D) 현장에서 중국을 기피한다고 해도 중국 석·박사 과정생들이 많지 않나.
△미국 주요 대학에 대한 중국 기업의 많은 재정 지원이나 중국 연구자들의 잦은 비지팅 스칼러가 크게 줄었다. 다만 미국 대학 연구실의 석·박사 과정생 중 중국인이 많은데 이들을 다 내보내면 연구실이 안 돌아가는 딜레마가 있다. 미소 냉전기에는 관계가 비교적 단순했는데 지금 미중 관계는 갈등과 협력이 얽혀 있다.
-바이든 정부의 대중 정책을 트럼프 때와 비교하면.
△중국을 잘 아는 전문가들이 훨씬 많이 포진해 있다. 트럼프처럼 거친 표현이나 레토릭은 줄었지만 압박은 전방위적으로 강화되고 있다. 바이든 정부의 대외 정책은 중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가 중국이 미국에서 퇴조하는 틈을 타 기회를 잡아야 할 텐데.
△실리콘밸리에 중국 자본이 많이 들어와 있는데 첨단 기술 쪽에서는 서로 조심스러워 한다. 미국 대학 첨단 기술 연구자에 대한 중국의 공격적인 연구비 제공도 줄었다. 한국에 기회가 될 수 있다. 중국을 대체하지는 못해도 틈새가 있다. 하지만 소극적이다. 한국은 멀리보고 투자하는 게 약하다.
-팍스 테크니카(기술패권) 시대 우리가 미국과 과학기술 동맹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보나.
△경제·안보와 과학기술 동맹은 피할 수 없다. 원칙을 정하고 유연성있게 대해야 한다.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의 패러다임은 시효를 다했다. 고도화되고 세분화된 전략을 펴야 한다. 경제도 안보와 관련된 부분은 미국과 함께 가야 한다. 소비, 관광, 유통, 건설 등 안보와 관련이 없는 부분은 중국과 적극 협력해야 한다.
-반도체 등 우리 대기업들이 미국에 공장 건설도 많이 하는 움직임인데.
△바이든 정부가 반도체 등 첨단 기술에 대한 공급망 관리에 나서고 있는데 한국 기업이 중국보다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게 전략적으로 유리하다. 지방정부 등의 지원도 많고 앨라배마·미시시피주 등 남부의 인건비는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덴마크는 실리콘밸리에 기술 대사도 두던데.
△기술 대사는 구글·애플 등 실리콘밸리 IT 기업의 임원들이나 스타트업들과 만나 모국을 연결한다. 영국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가 기술 대사를 겸직하고 있다. 일본도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지난 2015년 실리콘밸리를 다녀간 뒤 굉장히 적극적으로 나오더라. 인도의 경우 실리콘밸리 기업들에 고위급 임원들이 많아 모국과 연결을 잘한다.
-우리 대사관이나 영사관·KOTRA의 역할은 어떤가.
△첨단 과학기술 전쟁터에서 제 역할을 하기에는 구조나 인력 면에서 역부족이다. 대사관·영사관도 관성에 따라 일하고 KOTRA도 무역 입국에는 큰 기여를 했지만 21세기 첨단 기술 전쟁터에는 맞지 않다.
-우리도 현지에 과학기술 대사를 두는 게 낫겠다.
△삼성전자 부회장 출신이라든지 명성 있는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을 실리콘밸리 과학기술 대사로 임명할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을 알고 글로벌 기업들과 얘기가 돼야 한다. 대학과도 연결돼야 한다. 정부 부처의 중간급 관료로는 어림없다.
-차기 대통령(5월 10일 취임)이 한미정상회담 뒤 실리콘밸리에서 글로벌 기업인들과 협력 방안을 모색하면 좋겠다.
△차기 대통령이 워싱턴 DC만 방문하지 말고 반드시 실리콘밸리를 들러 글로벌 기업인들과 협력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스탠퍼드대나 UC버클리도 들렀으면 좋겠다.
-중국과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사태나 요소수 사태, 동북 공정, 문화 공정 등의 리스크가 있지만 관계를 멀리할 수도 없는데.
△미국·유럽·일본·호주 등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사드 사태와 코로나19 이후 반중 정서가 커져 중국도 신경을 많이 쓴다. 중국과 싸우자는 것은 아니고 세련되게 원칙을 갖고 일방적으로 밀릴 필요가 없다. 지난해 5월 한미정상회담 때 중국 인권과 대만 문제가 회견문에 있었지만 중국의 반발이 심하지 않았다. 호주와 일본이 미국과 손발을 맞추며 실익을 챙기는 것도 참고해야 한다. 다만 한국은 지난 몇 년간 북한 문제에 매달리느라 다른 중요한 외교안보 사안에 수동적이었다.
-한국 대선 과정에서 미래나 과학기술이 화두가 되지 못하고 있는데.
△굉장히 답답하고 안타깝다. 미래 한국, 과학기술, 외교안보 등에 관한 정책 비전이나 치열한 논쟁이 없다. 미국은 중국과의 패권 전쟁이나 미래 핵심 이익에 대해서는 공화당·민주당을 떠나 핵심 엘리트 사이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다. 제국의 DNA가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한국의 미래와 과학기술 등에 관해 각론이 다르더라도 어느 정도 합의를 봐야 한다.
-‘주요5개국(G5)’ 시대를 열기 위한 열쇠는.
△정부가 전문가 의견을 존중해 과학기술에 힘을 실어야 한다. 기업 활동이 위축되지 않게 하고 시장 논리로 경제를 풀어야 한다. 기술 혁신 생태계를 조성하고 글로벌 인재를 많이 길러야 한다. 한국에서는 큰 틀에서 보면 정치 논리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 미국은 앤서니 파우치 국립알레르기·감염병 연구소장이 트럼프 때 비판적으로 얘기했지만 지금도 하고 있다.
-한국의 혁신 생태계를 실리콘밸리와 비교하면.
△문화적 다양성이나 글로벌 인재 유치에서 미흡하다. 스타트업이 차익 실현(엑시트)할 수 있는 여건도 부족하다.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 기업들도 실리콘밸리에서 존재감을 키워야 한다. 정부가 전략적으로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
-북미관계·남북관계 전망은.
△바이든 정부는 북한에 별 관심이 없고 오직 중국뿐이다. 북한도 여력이 없다. 당분간 소강 상태가 지속될 것이고 한국의 차기 정부가 들어서면 뭔가 새로운 움직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He is…
연세대 사회학과를 나와 미국 워싱턴대 사회학 석·박사를 한 뒤 아이오와대 교수, UCLA 교수를 거쳐 2005년부터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APARC) 소장을 맡고 있다. 이 연구소는 미중 관계, 한미 관계, 미일 동맹, 북한 문제 연구는 물론 아시아의 기술 혁신과 기업가 정신, 의료 정책, 지속 가능한 성장, 글로벌 인재 육성 등을 연구한다. 그는 20년 전 스탠퍼드 한국학 프로그램도 만들어 한국과의 교류를 지속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