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파이터(inflation fighter)’라고 불리는 중앙은행은 경제 위기마다 ‘크라이시스 파이터(crisis fighter)’로 변신했다. 아수라장이 된 시장은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불러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그랬고 2년 전 지구촌을 강타한 코로나19 사태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은행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은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강타한 2020년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내려도 신용 경색이 풀리지 않자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동원했다. 환매조건부채권(RP) 무제한 매입과 회사채·기업어음(CP) 간접 매입 등의 ‘한국형 양적 완화’로 유동성을 대거 풀었다. 이때 풀린 돈은 총 95조 원에 이른다. 중앙은행이 최종 대부자로 불리는 연유다.
한은의 발권력 효과에 고무된 것일까. 이제는 한은이 고용도 책임지라는 정치권의 입법 발의가 줄을 잇고 있다. 한국은행법을 고쳐 통화신용정책의 목표에 ‘고용 안정’을 추가하자는 것이다. 21대 국회 들어 한은 목적 조항에 고용 안정을 추가하자는 의원 입법안은 모두 5개에 달한다. 이 가운데 4개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발의안이다. 현행 한은법 제1조는 ‘물가 안정’을 정책 목표로 삼되 부차적으로 ‘금융 안정에 유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회에 계류된 한은법 개정안은 두 가지로 나뉜다. 고용 안정을 제1 목표인 물가 안정과 동일 선상에서 두자는 안과 물가 안정을 1순위로 두되 고용 목표를 2순위 또는 3순위로 삼자는 방안이 있다. 전자는 미국 모델이고 후자는 뉴질랜드 모델이다. 의원 입법에는 통화정책 의결 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에 노동 전문가를 추가하고 ‘고용 안정을 위한 금융 지원’이라는 구체적인 실행 방안까지 담은 개정안도 있다.
재정 여력 떨어지자 이젠 한국은행 발권력 눈독
지난해 여름까지 탄력을 받던 국회 논의는 정치 지형이 대선 국면으로 바뀐 데다 지구촌에 인플레이션 압력이 쓰나미처럼 몰려오자 일단 주춤해진 상황이다. 하지만 한은법 개정 문제는 인플레이션이 진정되고 차기 정부가 출범하면 언제든 재차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역대 정권마다 ‘일자리 정부’를 자임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재정 여력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한은이 고용 안정을 통화정책으로 뒷받침한다면 재정 부담을 덜 수도 있다. 여차하면 한은의 발권력까지 활용할 여지도 있다.
한은법 개정의 취지는 그럴듯해 보인다. 경제정책의 최종 목표가 지속 가능한 성장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고 그 핵심이 고용 안정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정치권 주문의 이면에는 그동안 한은이 ‘매파(물가 안정 중시) 본색’에 경기 대응에 미진했다는 비판적 인식도 깔려 있다. 시장에서는 소극적인 한은을 흔히 ‘절간’에 비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치권의 한은 때리기와 역할 확대 주문에 숨겨진 이면을 봐야 한다. 전문가들은 고용 안정 목표가 초래할 위험성과 부작용을 경계하고 있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재정 여력이 점차 소진돼가는 상황에서 고용 안정 목표를 법제화한다면 돈을 풀라는 정치적 압력을 가중시키는 빌미가 될 것”이라며 “한은의 역할 확대는 독립적 통화정책을 저해하는 족쇄로 작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2016년 정부는 해운·조선 구조 조정에 한은의 발권력을 투입하자며 한은을 압박하기도 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법제화의 악용’ 가능성을 경고했다. 안 교수는 “기준금리를 내리고 올릴 때 고용 사정을 고려한다면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발권력 동원 압력까지 증대할 경우 한은이 어떻게 감당할지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여권 내에서는 ‘현대화폐이론(MMT)’ 같은 발권력 포퓰리즘을 공공연하게 거론하고 있다. MMT는 재정의 원천인 세금을 더 걷지 않고 발권력으로 재정을 충당하자는 급진적 이론으로, 살인적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위험이 크다. 지난해 9월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한은이 발권력을 이용해 소상공인·자영업자 채권을 매입해야 한다’는 취지로 발언해 파문을 낳았다. 윤 원내대표는 2016년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야당 간사 시절 정부의 발권력 동원 압력과 관련해 “국가 부채 증가를 의식해 한은에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며 반대한 적이 있다.
통화정책은 ‘무딘 칼’…고용만 발라내는 데 부적절
현실적으로 가장 우려되는 점은 과도한 실물 경기 부양으로 인한 물가 폭등이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지난해 7월 한국경제학회에 제출한 ‘한국은행의 고용 목표 도입’ 논문에서 “고용 안정 목표를 도입하면 경기 침체의 비용에 비해 인플레이션의 비용을 과소평가하거나 지나친 경기 활성화로 인플레이션 편향에 치우칠 우려가 있다”고 분석했다. 한마디로 매의 둥지에 비둘기만 득세할 것이라는 비판이다.
설령 고용 목표를 법제화한다고 해도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 경제 전반에 무차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통화정책이 고용 시장에만 한정된 영향을 주기 어렵거니와 성장과 고용 효과도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설문 조사에 의존하는 고용 지표가 실제 체감도와 따로 움직이는 맹점도 있다. 실업과 성장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오쿤의 법칙’도 기술 개발의 진전과 세계화, 고령층의 경제활동 증가 등으로 점차 위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jobless recovery)’이 대두된 것이 대표적이다. 금리 인하가 경기를 자극해 일자리 증가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더라도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청년 실업에 국한한 ‘정밀 타격’은 불가능하다. 20대 절반이 백수라는 ‘이태백’, 인문대 출신 구 할(90%)이 논다는 ‘인구론’은 다소 과장됐지만 고용 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잘 보여준다. 안 교수는 “통화정책의 칼은 워낙 무뎌서 고용만 발라내는 횟집에는 부적합하다”고 설명했다.
‘틴베르헌의 법칙’…단일 수단으로 복수 정책 목표 달성 못해
통화 당국이 상충되는 다수의 정책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려다가는 자칫 어느 하나도 제대로 이뤄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중앙은행의 정책 목표가 다수라면 그에 상응하는 다른 정책 수단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게 정설이다. 이를 ‘틴베르헌의 법칙’이라고 한다. 금통위원 시절 ‘슈퍼 비둘기’로 불렸던 조동철 한국개발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중앙은행이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정책 목표로 삼는 것은 곤란하다”며 “고용 목표는 통화정책의 영역으로는 부적합하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결국 고용 시장을 직접 겨냥한 정책 수단이 개발돼야 할 텐데, 선별적 정책은 국민의 동의가 필요하고 그것은 중앙은행이 아닌 정치의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최대 고용’ 목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미 의회는 1977년 연준 개혁법을 통해 물가 안정과 최대 고용을 양대 책무(dual mandates)로 부여했다. 전문가들은 미국 모델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설명한다. 안 교수는 “우리나라는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너무 커 성장의 고용 효과가 미국보다 훨씬 떨어지고 중앙은행의 독립성도 낮은 수준”이라며 “미국을 단순 추종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는 기축통화국이 아닌 데다 수출 의존도가 높고 자원 자급률은 낮다는 한계도 있다. 고용 목표를 보편화한 모델로 보기도 어렵다. 한은에 따르면 31개 해외 중앙은행 가운데 유럽중앙은행(ECB)과 일본은행 등 24개국은 고용 목표를 두지 않고 있다. 양 교수는 “시중에 돈이 없어서 청년 세대가 취업 대란으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다”라며 “성장의 일자리 창출 경로가 기업 규제와 노동시장 경직성으로 가로막혀 있는 데도 유동성을 공급하면 인플레이션과 자산 버블의 부작용만 부각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