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아닌 제작자로서만 나선 첫 작품 ‘고요의 바다’. 모든 게 새로웠다. 제3자의 입장으로 배우들을 바라보는 것도, 시청자들에게 작품 기획을 평가받는 것도 색달랐다. 부담은 더 커졌고 책임감은 막중해졌다. 그럴수록 더 냉정하게 객관화하면서 반성하려고 한다. 제작자 정우성의 마음가짐이다.
정우성이 제작 및 총괄 프로듀서로 나선 넷플릭스 시리즈 ‘고요의 바다’(감독 최항용)는 필수 자원인 물의 고갈로 황폐해진 근미래의 지구에서 특수 임무를 받고 달에 버려진 연구기지로 떠난 정예 대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SF 미스터리 스릴러다. 정우성은 최항용 감독의 대학 졸업 작품으로 연출했던 동명의 단편 영화를 보고 장편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작품의 세계관을 잘 전달할 수 있는 통로를 고민하던 와중에 넷플릭스를 만났고, 2021년 마지막 넷플릭스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로 나설 수 있었다.
“단편을 봤을 때 ‘물을 찾아서 달로 간다’는 역설적인 설정이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지구를 떠난 우주선과 우주복 안에서만 안전을 보장받는 대원들, 이런 제한된 공간 안에서 스릴을 구현하는 소재였기 때문에 한국적인 SF가 가능할 것 같았죠.”
정우성이 제작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6년 개봉한 ‘나를 잊지 말아요’가 그의 첫 제작 영화다. 다만 당시에는 주연 배우 겸 제작자로 활약했기 때문에 오로지 제작자의 시선으로만 바라본 작품은 ‘고요의 바다’가 처음이다.
“역시 제작은 어려워요. ‘나를 잊지 말아요’는 인간관계 안에서 사랑이라는 관념과 상상을 이야기한 것이어서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제가 출연도 함께 했기 때문에 제작자로서 제3자적 시점을 놓친 기억이 있어요. 이번 작품은 완벽하게 앵글 안에 놓인 배우로서 참여한 것이 아닌 제작자로서 참여였기 때문에 현장에서 어느 상황이 발생하면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죠.”
‘나를 잊지 말아요’도 ‘고요의 바다’처럼 단편을 장편으로 발전시킨 작품이었다. 작품을 선정하는 노하우나 기준이라고 할 것은 아직 없으나, 좋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것에 협력한다는 뜻에서 시작된 것은 공통점이다.
“‘나를 잊지 말아요’ 때는 영화 후배가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선배로서 참여해서 작품을 세상에 내보이는데 작은 협력을 하고 싶었던 거였어요. ‘고요의 바다’는 그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세상에 내놓은 것이라 평가받을 수 있는 절대적 요소가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상업적인 것과 어떻게 접목시켜서 내놓을까 고민했어요. 최 감독을 연출자로서의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하게끔 굉장히 가혹한 시간에 내모는 시간이었습니다.”
정우성이 제작사로 나선 건 단지 타이틀만 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고요의 바다’의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모두 인정할 정도로 그의 열정은 대단했다. 매일 세트장에 방문하고, 앞장서서 빗자루를 들고 다니며 달 지면을 구현한 세트장 흙바닥을 쓸었다. 특히 마트를 현장에 가져다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간식거리들을 구비해놓은 것은 배우와 스태프들이 가장 많이 박수를 보낸 부분이다.
“저에게는 당연한 거라는 생각이었어요. 혜택이라고 할 수 없는 작은 것들이죠. 부식을 준비한 것을 좋아해 주는 게 감사한 일이에요. ‘힘든 시간을 함께 이겨내는 우리는 팀이다’라는 결속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걸 표현하는 작은 행위일 뿐인데 마트라고 재밌게 표현해 줘서 감사해요. 모든 일터가 즐거워야 하잖아요. 즐거움이 있었으며 하는 바람이었습니다.”(웃음)
배우 출신 제작자이기 때문에 출연 배우들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정반대였다. 초반에는 공유, 배두나 등 출연진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어려웠다. 오히려 배우 선배이기 때문에 단순한 의견 교환으로 느껴지지 않고, 한마디를 해도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고 짐작했다. 어떤 말로 다가가고 어떤 시선으로 다가가야 할지 조심스러운 현장이었다.
“함께 현장에 있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나고, 각자 포지션을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친숙해졌어요. 이야기할 때 가벼워지는 시간으로 발전한 거죠.”
제작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정우성은 ‘카메오로 출연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이야기하지도 마라. 시선을 분산시키면 안 된다”고 했다고. 대신 작품의 재미를 위해 후반부에 목소리로만 출연해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작품은 공개 첫 주에 넷플릭스 글로벌 비영어권 TV 시리즈 순위에서 3위를 찍더니, 1위(1월 5일 기준)까지 올랐다. 뛰어난 성적이지만 최근 ‘오징어 게임’, ‘지옥’ 등 한국 콘텐츠가 전 세계에서 각광을 받은 것과 비교되며 신랄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제작자로서의 평가는 작품이 세상에 나가고 난 뒤 받는 것”이라고 했던 정우성도 작품이 공개된 이후 각양각색의 반응이 나오면서 “제정신이 아닌 마음으로 지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배우로 작품에 출연할 때는 ‘캐릭터 구현을 얼마만큼 했는가’에 대한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고민만 있으면 되는데 제작자로서는 전체적인 완성도나 많은 반응을 지켜봐야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글로벌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작품을 보고, ‘오징어 게임’을 통해 전 세계에서 한국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시기에 많은 시선을 한꺼번에 받는 게 크게 부담스러운 일이었죠. 아직까지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평가에 대해 냉정하게 보려고 해요.”
“새로운 장르에 대한 도전이잖아요. 세계관도 독특하고요. ‘달, 발해 기지 같은 것을 어떻게 구현해서 전달하는가’가 이 평가의 기준점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실질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예감했지만 지금 호불호의 소리가 크잖아요. ‘아 맞아. 이건 당연한 반응이야’라고 받아들이면서도 ‘왜 저렇게 봤을까. 전달이 부족했던 부분이 뭘까’에 대해 되새겨 보는 시간이 됐어요. 스스로가 제작자로서 전달하는 데 있어서 놓친 부분에 대해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만 ‘오징어 게임’ 신드롬 이후 흥행 기준이 ‘오징어 게임’에 맞춰지는 것은 가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기준이 빨리 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돌풍은 제작자나 감독, 배우가 의도해서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닌 우연적인 현상이고, 그런 기준으로만 작품을 접하다 보면 그 작품만의 재미와 메시지를 놓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우성이 제작자의 마인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젊은 시절부터 계속 이야기해왔던 것. 예전에는 후배가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제작자를 소개해 주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직접 얻은 깨달음이나 노하우들을 상용화해서 작품에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제작자로 나서기로 했다. “기획에 있어서 더 많은 작품들이 생각나고 욕심이 난다”는 그는 “제작자가 된 건 운명적인 것이었다”고 말했다.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애정도 훨씬 커졌고, 작업을 통해 새로 알게 된 배우들도 정말 소중해졌어요. 기획에 있어서 더 많은 작품들이 생각나고 욕심이 나요. ‘어떤 제작자처럼 돼야 되겠다’고 생각하거나 누군가를 동경한 적은 없어요. 현재는 제가 어떤 제작자인지 입증해 나가는 과정이에요.”
정우성은 영화 ‘보호자’로 감독 데뷔도 앞두고 있다. ‘보호자’는 액션 영화로, 정우성이 직접 출연하고 연출을 맡았다. 배우 김남길, 박성웅 등이 함께 출연한다. 단편 영화 연출을 한 적은 있지만 상업영화는 이번이 처음인 정우성은 “(연출이) 정말 재밌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주 즐거운 작업을 했어요. 그건 스스로의 즐거움이고, 이 작품에 연출자로서 어떤 관점을 제시하는지가 숙제죠. 정우성이 얼마만큼 해냈는지 평가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보호자’는 촬영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코로나19가 도래했거든요. 극장 개봉이 계속 밀리고 있는 상황인데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라 올 중반기에는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라는 타이틀부터 제작자, 감독이라는 이름까지 갖게 된 정우성. 앞으로 더 도전하고 싶은 영역이 있는지 묻자 “없다”고 단호하게 답했다. 지금 하고 있는 걸 잘해야 한다며.
“안정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새로운 도전이에요. 매 작품마다 제가 이 작품을 작업했다고 해서 다른 작품도 잘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거든요. 작품마다 늘 새로운 도전이기 때문이죠. 뭐든지 제가 안 해 본 경험이 일 수 있으니 잘 구현해 내는 게 숙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