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사진) 행복건축협동조합 이사장은 ‘일자리를 짓는’ 사람이다. 지상파 방송국 다큐멘터리 PD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그는 20년 간의 PD 생활을 접고 교수의 길로 들어섰다. 남들은 한 가지도 갖기 어려운 직업을 두 개나 섭렵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딸 교육 때문에 한국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떠났던 송 이사장은 아내가 우연찮게 건내준 부동산 관련 서적을 읽고 건축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과거 부모가 살던 서울 연회동의 본가를 새로 짓다가 소위 말하는 ‘브로커’들에게 호되게 당한 바 있던 그는 ‘다시는 어리숙하게 당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며 행복건축협동조합을 결성했다. 조합은 혼탁한 소형 건축시장에서 예비 건축주들이 적어도 모르고 당하는 일이 없도록 교육(행복건축학교)도 하고, 건강한 인식을 가진 시공업체들을 선별해서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11기 수강생을 배출시키며 조합도 안정화에 이른 요즘 그는 마지막 꿈인 골프 레슨 프로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열심히 담금질하고 있다. 라이프점프는 창간 2주년을 기념해 늘 도전하는 삶을 살아온 송 이사장을 만나 그의 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행복건축협동조합 이사장이다. 조합은 어떤 일을 하는가.
국내 중소형 건축 시장은 중고차 매매 시장 못지 않은 ‘레몬마켓(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저품질의 재화와 서비스만이 거래되는 시장 상황을 빗댄 표현)’ 이다. 건축주는 계약서 도장을 찍기 전까지는 건축사, 시공사, 인테리어 업체 등으로부터 대접을 받는 ‘갑’이지만 도장을 찍는 순간 ‘을로’ 바뀐다. 스스로 집을 지어 본 경험과 노하우가 없이 덤비면 업자들로부터 소위 ‘눈탱이’ 맞기 일쑤다. 조합은 레몬마켓인 소형 건축 시장에서 여러가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축주들을 위해 건축주와 건축 전문가가 함께 설립한 비영리 법인이다. 예비 건축주들이 모르고 당하는 일이 없도록 교육하고, 건축주와 건축 전문가들이 서로 믿고 투명하게 집을 지을 수 있는 건축 플랫폼을 지향한다.
-조합을 결성한 이유는.
주변에 찾아보면 내 집이나 건물을 짓는데, 몰라서 당하는 예비 건축주들이 너무 많았다. 나 역시 처음 집을 지을 때 엄청 고생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장남이었다. 어머니가 사시던 서울 연희동 집을 부수고 새 집을 지었는데 업자들로부터 뒷통수를 맞고 소송까지 갔다. 주변에 건축학과 출신 친구들이 있어서 조언도 받았지만 집을 짓는게 보통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총 여덟 차례의 집을 지었는데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노하우를 다른 예비 건축가들과 나누고 싶었다. 돈을 벌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비영리 법인으로 조합을 결성했다.
-원래 건축 분야를 전공하지 않은 걸로 안다. 첫 직업은 뭐였나.
지상파 방송국에 입사해 다큐 감독으로 20년 정도 일했다. 전세계를 다니며 여러 다큐를 제작했다.마지막 5년은 대학에 방송 관련 학과의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PD와 교수는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이다. 전공 분야가 아닌데, 건축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가게된 이유는.
부모 입장에서 난 착한 아들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했고, 지상파 방송국에 취업했다. 전공을 살려 PD가 됐다. 석사와 박사를 수료했고 대학에서 언론과 관련한 강의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마음 속 한켠에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나’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새롭게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내 꿈은 건축가였다. 하고싶은 걸 하지 못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행동으로 옮겼다.
- PD와 겸임교수를 그만두고 바로 건축 분야에 발을 디딘건가.
그건 아니다. 돌고 돌아왔다.(웃음) 딸이 하나 있다. 경쟁이 치열한 국내 교육 환경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내와 상의 끝에 초등학교 5학년 졸업 직후 딸을 뉴질랜드로 조기 유학을 보내기로 했다. 당시 아내도 방송국 편성 PD였다. 국내 교육엔 희망이 없다고 봤다. 아이 교육을 위해 아내가 먼저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를 따라 갔다. 나는 2년 정도 한국에서 겸임 교수를 더 하면서 기러기 생활을 하다가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뉴질랜드로 갔다.
-왜 하필 뉴질랜드인가.
특별한 이유는 없다. 연고도 없다. 1996년 아내와 결혼해서 신혼여행을 뉴질랜드로 갔는데 그때의 기억과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곳에서 생계는 어떻게 해결했나
맞벌이 하면서 벌어 놓은 돈이 꽤 있었고, 현지에서 펜션을 운영했다. 여행사에 아는 분이 있어서 틈틈이 여행 다큐를 찍으면서 소일했다.
-한국에 다시 돌아온 이유는
딸 때문이다. 중고등학교를 뉴질랜드에서 졸업했는데 대학은 한국에서 다니고 싶다고 하더라. 딸 쫓아서 은퇴했는데, 딸 때문에 다시 한국에 오게됐다.(웃음) 학업을 위해 딸과 아내가 먼저 한국에 들어갔고, 나는 마무리할 일이 있어서 1년 정도 더 머물다가 들어왔다. 바로 그 1년의 시간이 내 인생을 변하게 했다.
-무슨 의미인가.
건축 쪽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다. 아내가 뉴질랜드에 홀로 있는 내가 적적할까봐 경매 관련 책을 2권 보내줬다. 평소 내가 건축과 땅 보는 것을 좋아하는 걸 아내가 알고 보내준 거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 오면 경매로 집을 산 뒤 개발해서 팔면 좋을 거 같다고 본거다. 요즘 말로 디벨로퍼다.
-귀국해서 어떤 일을 했나
후배가 부동산 건설사업관리(CM) 회사를 운영했는데 프로젝트매니저(PM)로 와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내 입장에선 건축 관련 업무를 배울 겸 수락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소형 건축시장의 병폐를 목격했다. 지금의 행복건축협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한 계기다.
-당시 어떤 문제점을 알게 됐나.
부동산 PM의 역할은 건축주를 도와주는 역할이다. 수수료를 받지만 건축주가 집을 지을 때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줘야 한다. 그런데 실제 현장은 반대였다. PM이나 CM은 10%씩 수수료를 받으면서 건축 비용을 절감하는 노력은 게을리했다. 건축사와 시공사들로부터도 수수료를 떼어갔다. 10억짜리 건축 프로젝트에 2억원이 수수료로 나가는 꼴이다. 그럼 10억짜리 집이 아니라 8억짜리 집을 짓는거다. 이런 일들을 목격하면서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합이 운영하는 행복건축학교의 모토가 ‘모르고 당하지 말자’와 맥이 닿아 있는 것 같다.
맞다. 후배 회사에서 스텝들과 대판 싸우고 나왔다. 술을 엄청 먹고 ‘사기꾼은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비영리 건축협동조합을 만들고, 건축학교를 중심으로 건축주들의 커뮤니티를 만들기로 했다. 수수료 구조를 다 알고 있다. 건축학교 강의에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과감없이 알려줬다. 계약을 하고 나면 건축주는 ‘을’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소상하게 강의했다. 가령 시공사가 건축을 시작하면 추가비용을 요구할거고, 중간에 공사를 멈추는 일도 부지기수로 일어날 것이란 얘기를 해주는 식이다. 시공과 동시에 소송을 대비해 항상 근거자료를 만들어 놓으라는 말도 빠짐없이 했다.
- 견제하는 세력은 없나. 기존 업계 사람들은 싫어할 수도 있는데.
우린 적이 없다. 사실 기존 건축업계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온 측면도 있다. 그런데 소형 건축시장은 착하게 해도 되는 시장이다. 건축주도, 건축업자도 최하가가 아닌 적정 가격을 찾아가자는 게 우리가 추구하는 모델이다.
-건축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한지 3년차에 접어들었다. 처음과 비교할 때 어떤 변화가 있나.
건축주의 연령대가 낮아졌다. 30대 증권사 과장도 있고, 20대 부동산공인중개사도 있다. 부모와 함께 오는 자녀들도 있다. 젊고 새로운 감각을 지닌 건축주들이 늘어나고 있다. 바람이 있다면 지금까지 조합 운용은 내가 주도해왔는데 앞으로는 시스템화해서 나 없이도 굴러가게 하는 것이다.
-5060 세대에게도 새 집을 짓는 것은 좋은 노후 수단이 될 수 있지 않나.
그렇다. 건축협동조합과 같은 조직들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이제 연금만으로 사는 시대는 지났다. 부모 세대를 봐라. 아파트 말고 보유 자산이 없지 않나. 수익형 꼬마빌딩이 각광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건물을 지어서 월 임대수익이 400~500만원 정도만 되면 노후가 괜찮다. 그래야 손주한테 용돈도 줄 수 있고 하지 않겠는가.
-큰 돈이 되지 않음에도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뭔가.
선한 영향력을 많이 전파하고 싶다. 조합 소속 건축주가 집을 짓고 나면 반드시 다음 사람을 위해 멘토 역할을 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조합이 설립돼 운영된지 3년이 넘다보니 사례들이 많이 쌓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다.
-어렸을 때 가졌던 건축가의 꿈을 이뤘다. 또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
최근 새로운 꿈이 생겼다. 바로 골프 레슨 프로다. 어렸을 때 예술을 좋아해서 건축가가 되고 싶었지만 중고등학교 때 꿈은 운동 선수였다. 나이가 들다보니 골프가 내 몸에 맞더라. 최근엔 레슨프로 자격증도 땄다. PD와 교수, 건축가에 이어 써드 라이프는 골프레슨 프로로 사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