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금리 인상과 인플레이션 공포에 국내 채권시장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국내 기업들의 자금 조달에 비상이 걸렸다. 당장 국내 자본시장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진행한 공모채 수요예측에서 미매각이 발생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이다. 1500억 원을 모집한 3년물에 1100억 원의 주문만 들어왔다. 500억 원을 예상한 5년물의 경우 전량 미매각을 피하지 못했다. 크레디트 투자 심리가 극도로 얼어붙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치솟는 국채금리…"추가 상승 가능성"=11일 국내 채권시장에서 국고채 3년물 금리가 2.343%까지 오르며 7년여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자 투자 심리가 빠르게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연초는 국채시장 거래가 가장 활발한 시기지만 올해는 투자 심리 위축으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안예하 키움증권 연구원은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오름폭이 예상을 뛰어넘어 연준의 긴축 속도가 가속화될 가능성이 커졌다”며 “3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이후 물가 피크아웃을 확인하는 것이 미국 국채금리 방향의 관건으로, 이때까지는 국내 채권시장의 변동성은 예측 불허여서 투자 심리 위축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11일(현지 시간) 미국 국채 10년물은 2%를 돌파했고 2년물은 1.6% 수준까지 올라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움직임에 대한 정부의 대응 방향은 채권시장의 방향성을 좌우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특히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에서 확정될 추경 규모도 국내 채권시장에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의 추경 증액 요구가 거세진 가운데 추경 규모가 채권시장에 부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20조~30조 원 수준의 추경 규모를 예상해 이미 선반영됐으나 규모가 급격히 늘어날 경우 국채금리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박태근 삼성증권 연구원은 “미국 국채금리는 기준금리 인상 폭을 반영할 경우 고점이 높아져 국내 채권 시장금리의 상방 압력도 커질 것”이라며 “미국 10년물의 상단을 2.5%로 예상한다면 국내 기준금리는 2%대, 국고채 10년물은 3.1%까지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인지 국내외 채권시장의 변동성 확대 여파로 개인투자자들은 일제히 채권형 펀드의 자금 환매에 나서고 있다. 한국펀드평가에 따르면 11일 기준 한 달간 국내외 채권형 펀드에서는 1조 1000억 원의 자금이 유출됐다. 6개월간 5조 원에 가까운 자금이 빠져나갔다. 주식형 펀드 대비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다는 평가를 받던 채권형 펀드에서 대규모 자금 유출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례적이라는 분석이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채권이 안전한 투자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수개월째 변동성이 확대되고 있다”며 “국채금리 상승으로 수익률이 저조해 ‘손절’을 택하는 투자자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회사채 시장 빨간불…기업들 좌불안석=특히 회사채 시장도 8년 만에 최고점을 찍으며 경기 불안에 일조하고 있다. 롯데그룹의 중간지주회사 성격인 호텔롯데(신용 등급 AA-)은 3년 만기 회사채를 연 3.25%의 금리로 발행했다. 10대 그룹 우량 계열사 3년물의 연 3%대 발행은 8년 만이다. 심지어 모집 금액을 채우지 못하는 현상이 잇따르고 있다. 급식 업체인 CJ프레시웨이(A)와 전선 업체 LS전선(A+) 등은 모집 물량을 채우지 못했다. 발행 계획을 아예 연기하는 회사들도 나오고 있다. 한솔제지(A)는 신용 등급 A급 이하 회사채에 대한 투자 심리가 얼어붙자 최근 1000억 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 계획을 중단했다.
게다가 회사채 금리가 치솟으면서 기업의 자금 조달 부담이 빠르게 늘고 있다. 삼성과 롯데·신세계 등 우량 등급의 대기업 계열사들이 연 3% 안팎의 금리로 자금 조달에 나섰다. 채권 평가 회사들에 따르면 국내 우량 회사채(AA급 이상)의 평균 이자 비용은 9일 2.8% 수준으로 8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1년 전(1.3% 수준)과 비교하면 세 배 가까이 높아진 것이다.
이뿐 아니라 비우량 기업이 부담해야 할 이자는 연 9%에 육박해 자금 조달 시장에 긴장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2014년 이후 8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금리 상승 속도가 시장의 예상치를 웃돌면서 그동안 저금리로 버텨온 한계 기업들은 자금난에 내몰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는 기관투자가들이 시장금리 상승에 따른 평가손실을 우려해 투자를 꺼리는 이유가 되고 있다. 예컨대 대기업은 1년 전보다 두세 배 높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다. 신세계(AA)의 경우 연 2.96%의 금리로 3년 만기 회사채를 발행했다. 지난해 1월 발행 당시 금리(연 1.21%)와 비교하면 2.4배 높다.
◇비우량 회사채 연 9% 근접…발행 줄줄이 연기·철회=더 큰 문제는 비우량 기업들이다. 투자 적격 최하단인 BBB-등급 회사채 금리도 8년 만에 최고 수준인 연 9%에 근접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장기화로 영업실적 회복이 늦어지고 정부의 정책적 지원마저 다음 달 종료를 앞둔 상황이어서 재무 안정성 유지에 대한 우려가 높다. 변동성이 더 커져 채권시장의 수급 불균형이 상반기 내내 지속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분명한 것은 회사채 시장의 냉각 기류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무엇보다 회사채 발행을 잠정 중단하고 연기한 곳이 적지 않다. 한솔제지(A)와 현대위아(AA-), HDC현대EP(A-), 현대건설(AA) 등도 회사채 발행을 줄줄이 철회·연기한 상태다.
김상만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예년의 연초 효과와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면서 자금을 조달하려는 기업들의 발행 물량이 역대급으로 쏟아지지만 투자자들의 투자 심리 위축으로 기업들도 애를 먹고 있다”며 “여기에 미국 금융시장의 영향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현호·박시진·최필우 기자 hhle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