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기관 직원에게 타인의 계좌번호 등 금융거래 관련 정보를 물어보기만 해도 처벌토록 한 현행 금융실명법 조항은 헌법에 어긋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나왔다.
헌재는 24일 금융실명법 4조 제1항 등이 헌법상 비례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내용의 위헌제청 심판에서 재판관 8대1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금융실명법 4조 제1항은 즉시 효력을 상실했다.
재판관들은 “심판 대상 조항은 정보 제공 요구의 사유나 경위, 행위 태양, 요구한 거래 정보의 내용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금지하고 형사 처벌을 하도록 한다”며 “입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최소 침해성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다만 반대 의견을 낸 이선애 재판관은 “심판 대상 조항은 금융 거래의 비밀 보장이라는 공익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라며 “이런 공익은 타인의 금융 거래에 관한 정보 제공을 자유롭게 요구할 수 있는 일반적 행동자유권으로 인한 사익보다 크다”고 했다.
제청신청인 A씨는 은행 직원에게 타인인 B씨의 계좌번호를 요구했는데, 이는 금융실명법 위반이므로 A씨는 기소됐다. 금융실명법 4조 제1항은 명의인(위탁자·수익자 포함)의 서면 요구나 동의가 없는 상황에서 금융회사 종사자가 거래 정보나 자료를 제공·누설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또 어느 누구라도 타인의 거래 정보를 금융 종사자에게 요구할 수도 없게 했다. 위반하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다만 법원의 제출 명령이나 영장이 있는 경우, 세무당국이 상속·증여·탈세 등을 확인하려는 경우, 국회 국정조사위원회가 제출을 의결한 경우, 금융당국 조사에 필요한 경우 등은 예외적으로 금융기관이 특정인의 거래 정보를 제공하게 했다.
A씨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어떤 이유에서건 금융기관에서 직원에게 타인의 계좌번호와 같은 금융 거래 정보를 알려달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범죄화하는 것은 타인의 사생활 비밀의 유지권이 침해되는 정도와의 균형을 상실한 것”이라며 금융실명법에 위헌 소지가 있다고 보고 헌재에 심판을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