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지금까지 글로벌공급망(GVC)에 편입해 많은 혜택을 누려왔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은 지정학적 이슈 부각으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김현욱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기업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저렴한 노동력 및 신시장 개척을 위해 개발도상국에 진출하는 게 유리했지만 이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을 중심으로 공급망을 옮겨가야 하는 상황”이라며 “우리나라도 내수 시장을 키워가면서 글로벌 불확실성에 대한 내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미 글로벌공급망은 미중 간의 디커플링이 심화되고 있다. 여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30여 년간 이어져온 자유무역 기조가 또 한 번 흔들리게 돼 한국의 경제 안보 전략 또한 궤도 수정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59.9%(2020년 기준)로 주요 20개국(G20) 중 독일(67.0%)에 이어 2위권이다. 자유무역 기조 쇠퇴는 그 자체로 한국 경제에 상당한 악재다.
전문가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안보’ 중심의 글로벌 무역 흐름에 빠르게 동참하는 한편 미국·인도·호주·일본 등 4개국이 참여하는 비공식 안보협의체인 쿼드(QUAD) 가입 또한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28일 외교·통상 업계에 따르면 미국은 러시아 수출 통제에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을 적용해 미국 기술이 활용된 제품을 러시아에 수출할 경우 미국 상무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문제는 유럽연합(EU)·일본·캐나다·호주·뉴질랜드·영국 등 32개국은 FDPR 규제 조치에서 제외된 반면 한국·중국 등은 포함됐다는 점이다.
정부는 부랴부랴 수출 통제 허가 심사를 강화해 대러 전략물자 수출을 차단한다고 밝혔지만 향후에도 FDPR 적용 제외를 받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산업계에서는 이미 한국의 중립 외교가 향후 미국의 무역 제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는데 이번 FDPR 적용 제외로 현실화됐다”며 “무엇보다 한국의 신북방 정책과 친중 정책 등이 미국의 대외 정책 방향과 맞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실제 이번에 FDPR 제외를 받은 국가는 미국 중심 정보 동맹 협의체인 ‘파이브 아이즈’ 가입국 호주·뉴질랜드·영국을 비롯해 쿼드 가입국 일본이 포함됐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미국은 한국의 쿼드 가입을 에둘러 압박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주요 국가별 진영 구도가 명확히 구축된 상황에서 한국이 쿼드 가입 시기를 놓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글로벌 무역 질서가 주요 국가별 안보 정책에 크게 좌우되면서 정부 통상 정책 기조도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정부는 지금까지 시장 개방 시 각 산업군별 영향 및 수출 확대 효과 등을 중심으로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 가입을 확대하며 무역 영토를 넓혀왔다. 올 2월 발효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나 올 상반기 내 가입 신청을 준비 중인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이 대표적이다.
반면 RCEP과 CPTPP에는 미국이 불참한 만큼 우리로서는 미국 정부가 올 상반기 내로 발표할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 더 집중할 필요성이 있다. IPEF는 △무역 원활화 △공급망 안정화 △디지털 경제 △탈탄소 청정 에너지 △인프라 협력 △노동 기준 확립 여섯 가지 안이 담길 예정이다. IPEF는 FTA와 달리 협약보다는 협의체 구성 형태로 진행될 것으로 전망돼 참여하더라도 구속력이 약하다는 평가가 있지만 사실상 중국 압박용 조치라는 점에서 미국 측이 공을 들일 가능성이 크다. 이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오는 5월 방한해 신임 대통령과 IPEF 관련 사안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에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보듯 앞으로 신냉전 기조는 더 강화될 것"이라며 “이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 진영과 러시아·중국·이란·북한을 중심으로 한 비자유 진영 간의 격돌을 뜻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성장을 이끌었던 다자주의 체제가 복원되기 쉽지 않은 만큼 미국을 위시한 서방 진영과 보조를 같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한국은 국내 기업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하면 우방국이 형성 중인 연합전선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이번 기회에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더욱 돈독히 구축해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