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외환 보유액은 최대 6400억 달러(2월 기준)로 추정된다. 중국과 일본·스위스에 이어 세계 4위 수준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전만 해도 러시아 정부는 물론 서방 외신들이 러시아가 각종 제재에 한동안 버틸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배제, 중앙은행 거래 차단 등 서방의 제재가 시작되자 러시아 루블화 가치는 30% 이상 급전직하하고 러시아는 극심한 외화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왜일까.
1일 외신들의 분석을 종합하면 시장에서는 탄탄해보이던 러시아의 대비 태세가 예상보다 허술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미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의 마이클 번스탬 연구원에 따르면 총 6310억 달러의 러시아 보유 외환 가운데 러시아 중앙은행에 예치된 규모는 절반에도 못 미치는 2350억 달러 수준이다. 60% 이상은 미국과 유럽·일본 등 해외 금융기관에 예치된 상태로 자산동결 등 각국 정부의 제재가 시작되자 꼼짝없이 해외에 묶이게 됐다는 것이다.
번스탬 연구원은 “외환의 해외 보관은 러시아 수출입 거래의 편의를 높이기 위한 조치”라면서도 “이로 인해 상당수 러시아 외환이 국제 제재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고 설명했다. 전날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실(OFAC)은 러시아 중앙은행이 미국에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자산을 동결한 바 있다.
게다가 러시아에 있는 외환 가운데서도 달러화는 120억 달러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중국 국채(840억 달러)와 금(1390억 달러)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 국채는 매각해도 달러가 아닌 위안화로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뾰족한 수가 못 된다는 분석이다. 또 제재 여파로 러시아와 금 거래에 선뜻 나설 매수자를 찾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결국 러시아가 손에 쥔 외환 ‘실탄’은 전체의 2% 남짓한 120억 달러에 불과한 셈이다.
여기에 국제금융연구소(IIF)는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가 현재 보유한 241억 달러 규모의 국제통화기금(IMF) 특별인출권도 행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로 인해 러시아 금융시장은 우크라이나 침공과 함께 사실상 붕괴 상태에 빠졌다. 러시아 중앙은행이 전날 기준금리를 종전 9.5%에서 20%로 10%포인트 넘게 대폭 인상한 것도 외환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2월 소비자물가가 6년 만의 최고치로 치솟을 정도로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억누르기 위한 극약 처방에 해당한다. 옐비나 나비울리나 러시아 중앙은행장은 “러시아 경제는 완전히 비정상적인 상황과 마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국민의 피해도 이어지고 있다. 금리 폭등으로 당장 대출을 받아 주택을 구매한 현지 대출자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외신들은 서방과의 교역이 막히고 물건 값이 치솟으면 러시아 서민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질 것으로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