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후보를 명시하지 않으면 현수막으로 투표를 독려할 수 있도록 한 선거법을 놓고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적용 기준이 모호한 탓에 매번 선거 때마다 선관위의 판단이 엇갈리자 일각에서는 정치적 중립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폐지해야 한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3일 서울경제가 서울 주요 도심 일대를 취재한 결과 시내 곳곳에 “경제일꾼에게 투표합시다” “비리와 탈법에 유능한 사람은 안 됩니다” “법카 앞으로, 횡령 제대로” “주 4일제에 투표합시다”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대선 후보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그간 각 후보의 공약이나 논란에 비춰 봤을 때 어떤 후보에 대한 지지 또는 비방 문구인지 쉽게 짐작이 가능했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선거법 위반의 소지가 다분하다는 입장이다. 공직선거법 제90조 1항은 선거일 전 180일부터 선거일까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시설물의 게시를 금지하고 있다. 또 동법 58조 2항에서는 현수막을 통한 투표 독려는 허용하되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를 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을 포함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관할 지자체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해당 현수막들을 철거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서초구청의 한 관계자는 “선관위에 해당 현수막을 문의했지만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고 해서 의아했다”며 “일단 특정 인물을 직접적으로 비방하거나 인신공격성 내용이 아니라면 그대로 두고 있다”고 말했다.
선관위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는 방향으로 판단 범위를 넓혔다는 입장이다. 선관위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과도한 비방을 하거나 후보를 특정하지 않으면 어느 정당의 후보인지와 관계없이 똑같이 대응하고 있다”며 “특정 후보를 유추할 수 있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더라도 기준이 애매해 따로 규제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관위가 매번 잣대를 다르게 적용하는 탓에 정치적 논란만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선관위는 지난해 4·7 재보궐선거 투표 독려 현수막에 적힌 ‘내로남불’이라는 단어가 특정 정당을 연상시킨다며 이를 금지했지만 올해는 선거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상반된 입장을 내놓았다. 선거마다 자의적 판단으로 허용 여부를 결정하다 보니 무엇보다 공정해야 할 선관위가 정작 정치적 중립성을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선관위의 일관성 없는 법령 적용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넓히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법적 다툼의 가능성과 부작용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려면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선관위가 법 개정 전에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허용 범위를 해석하는 것은 추후 문제 발생의 소지가 충분히 있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특정 후보를 비방하거나 지지하는 현수막을 걸지 못하도록 한 선거법 조항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해당 선거법 조항은 모든 국민들에게 후보 지지나 반대 의견을 담은 현수막을 금지하고 있다”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표현의 자유는 무엇보다 우선해야 하기에 해당 조항은 과한 처사라고 본다”고 말했다.
선관위도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어느 정도 갖고 있지만 법 개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선관위는 지난 2013년과 2016년, 지난해까지 세 차례에 걸쳐 선거법 90조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으나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선관위 관계자는 “법 집행기관으로서 현행법과 판례에 따라 선거법을 적용해야 하는 만큼 한계가 있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