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만든 가이드라인이 모범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기업에 불필요한 부담만 커지게 됐습니다.”
기업 지배구조를 연구해 온 전문가들은 정부가 1조 원 이상 유가증권 상장사를 대상으로 최고경영자(CEO)의 승계 정책을 제출하라고 요구한 데 대해 ‘관치’라고 평가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6일 상장사의 물적 분할로 주주들의 피해가 커지자 이에 대한 대책으로 ‘기업 지배구조 보고서 가이드라인’ 개정안을 내놓으면서 CEO의 승계 정책을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내용까지 넣었다.
그간 승계를 앞둔 기업들이 주주가치를 훼손한 사례가 있었던 만큼 승계 정책이 투명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동의한다. 다만 그 방식이 정부 주도로 진행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승계 정책은 회사의 전략과 시장에 미치는 파급력이 큰 대외비라는 점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민간 기업의 자율성을 과도하게 제약할 수 있다. 경제 단체들은 “한국처럼 디테일하게 기업 지배구조를 간섭하는 나라는 없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실제 정부가 가이드라인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주요 20개국(G20),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업 지배구조 모범 규준’에는 “이사회가 승계 절차를 감독할 의무만 있다”는 원론적인 내용만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승계 정책을 요구하며 구체적인 기준 없이 ‘명확히’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한 대목도 글로벌 스탠더드보다는 관치 금융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정부는 가이드라인이 권고안이라고 강조하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벌점 부과 등 이미지에 미칠 타격이 적지않아 기업의 부담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 승계 과정이 구체적으로 공표된다고 해도 정부의 계획대로 주주 피해가 예방될지도 미지수다. 기업의 승계 과정이 외부에 공개됐을 때 경영권 분쟁이 더욱 부각되고 주가 변동성이 커지는 등 시장의 혼란이 가중된 전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가 기업의 승계 과정까지 간섭하는 고육책을 쓴 배경에는 주주보다 가족을 우선하는 국내 기업의 풍토도 한몫했다. 그러나 관 주도의 ‘억지 공개’보다는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민간에 맡기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자본시장 발전에 기여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