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감 나게 연기하는 배우들 속에서 유난히 잊히지 않는 얼굴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신 스틸러’라고 부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소년심판’의 ‘파란 머리 걔’ 배우 김보영이 그런 존재다.
김보영은 ‘소년심판’(극본 김민석/연출 홍종찬)에서 최영나 역을 맡아 살벌한 연기와 파란색 머리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최영나는 푸름청소년회복센터에서 생활하는 소년범으로, 센터를 벗어난 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이들에게 조건 성매매를 시키는 포주 역할을 하는 인물. 문제아인 그에게도 어머니는 애틋한 존재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새 가정을 꾸리고 모른 체하는 어머니를 보고 무너진다. 그런 최영나의 모습은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을 벼랑 끝에 몰리게 하는 어른들의 무책임과 그릇된 환경을 돌아보게 한다.
“실제 일진을 데려와 연기시킨 것이 아니냐”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현실감 넘치는 연기를 펼친 김보영은 놀랍게도 ‘소년심판’이 데뷔작이다. 연기를 시작한 지 10개월 만에 처음으로 오디션을 봤고, 그렇게 ‘소년심판’이 첫 작품이 됐다. 올해 2년 차 배우가 된 그는 자신을 “완전 햇병아리”라고 소개했다.
“부담감도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소년범을 연기하면서 절대 미화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최영나 자체로만 연기했어요. 거의 영나로 살았었죠. 초반에 연기 연습을 할 때는 못 빠져나올 때가 가끔 있었거든요. 그때 친구들이 옆에서 ‘빨리 빠져나와야지’라고 해줘서 울다가 빠져나오려고 노력했어요.”
최영나를 연기하며 양가감정이 들기도 했다.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범죄를 저지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최영나를 감싸지 말아야겠다고 하다가도, 하나뿐인 어머니가 “모르는 애”라고 하는 걸 보고 최영나가 얼마나 상실감이 컸을지 걱정됐다. 화도 나고 배신감도 들고 슬프기도 한 뒤섞인 감정 속에서 ‘엄마 앞에서는 무너지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눈물을 삼키고, 마지막에 모든 걸 내려놓고 나서야 울음을 터트리는 최영나가 안타까웠다.
“최영나는 일단 죗값을 치러야겠죠. 죗값을 치르고 나와서 심리 치료를 받을 것 같아요. 최영나라면 이제 아무도 못 믿지 않을까요? 엄마라는 존재를 좀 잊고 싶을 것 같아요. 저였다면 그냥 ‘나는 엄마가 원래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살 거예요.”
‘김보영의 최영나’를 만들기 위한 과정은 다양했다. 홍 감독이 소개해 준 연기 선생님과 함께 욕을 차지게 하는 연습도 해보고, 학교에서나 밖에서 학생들을 보며 말투도 연구했다. 실제 소년원에서 연기 치료를 한 경력이 있는 연기 선생님에게 소년범들에 대한 일화를 듣는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외적인 설정도 하나씩 차근차근 쌓아올렸다.
“당시 살이 약간 통통하게 좀 올라 있는 상태이긴 했는데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관리를 해야겠다 싶어서 감독님과 상의를 해봤거든요. 감독님이 ‘살은 빼지 말자’고 하셔서 역할에 맞게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먹었어요. 많이는 아니고 1~2kg 정도 찌웠었죠. 그때랑 현재를 비교하면 3~4kg 정도 차이가 나고요.”
“원래 헤어스타일 시안은 보라색이었어요. 디자인은 똑같았는데, 제가 분장팀에 혹시 파란색은 어떨지 여쭤봤어요. 이 캐릭터 자체가 풍기는 분위기가 차가워 보였는데 보라색보다는 파란색이 확연하게 차가워 보이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염색하고 나서 물이 자주 빠지더라고요. 그래서 염색을 자주 했어요. ‘제가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건 또 뭐가 있을까요?’라고 여쭤보고 염색약을 사서 집에서 해보기도 하고요. 4개월 정도 파란 머리를 유지했어요.”
‘파란머리 걔’ 최영나의 이미지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김보영을 보고 쉽게 매치시키지 못할 것이다. 이제 갓 스무살이 된 김보영의 실제 모습은 밝고 통통 튀는 아이돌 같기도 하다. 어두운 그늘이 있는 최영나와는 180도 다르다. 그의 MBTI는 타고난 리더형으로 불리는 ENTJ. 그는 “승부욕도 좀 있고, 일할 때 완벽하게 끝내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는 내숭을 떨지도 않고 엄청 털털한 성격이에요. 뒤끝도 없고요. 조금 쿨하다고 할까요. 할 말은 꼭 하는 성격은 영나와 닮은 부분이에요. 대신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이 말은 제가 꼭 해야겠다 하면 해요.”(웃음)
연기가 아닌 춤을 전공했다는 것도 놀라운 부분이다. 아이돌의 꿈을 갖고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그는 유명 스타들을 배출한 한림예고(한림연예예술고) 실용무용과 11기로 입학했다. 그렇게 춤에 열중하다가 2학년 무렵에 연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연기 공부를 시작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배우의 꿈을 꾸게 됐다.
“춤과 연기를 두고 되게 많은 생각을 했어요. 한두 달 연기학원을 알아보면서 춤을 놔버리는 것보다는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춤을 좋아하니까 지금도 아예 놓지는 않고 있고요. 사실 요즘 춤 수업도 듣고 싶고 연습도 하고 싶은데 여건이 안 돼서 가끔 연습실을 대관해서 혼자 춤을 추고 있어요.”
알고 보니 김보영은 지난 연말을 뜨겁게 달군 여고생 댄서 서바이벌 프로그램 Mnet ‘스트릿댄스 걸스 파이터’(이하 ‘스걸파’)에도 출연하려고 했었다고. 그는 “친구들과 ‘스걸파’ 준비까지 하다가 사정이 생겨 지원하지 못했다”며 “‘스걸파’에 지원한 한림예고 친구들은 거의 다 친하고, 서공예(서울공연예술고) 친구들도 몇몇 아는 친구들이 있다”고 말했다.
동기들 중에는 이름을 떨치고 있는 아이돌도 많다. 그룹 있지 유나를 비롯해 엔하이픈 선우와 제이, 미래소년 동표, 베리베리 강민 등은 김보영과 같은 실용무용과 11기로, 최근 졸업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수업이 잦고 서로 바쁜 스케줄 때문에 모두 친해지지는 못했지만, 유나와는 여러 번 같은 반을 하며 친분을 쌓았다.
“유나한테도 (‘소년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어요. ‘내가 이걸 찍었는데 진로를 연기로 바꾸게 됐다’고 하니까 유나가 ‘혹시 필요한 거나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게 있다면 연락해도 좋다’고 하더라고요. 의리녀죠. 유나가 바쁘다 보니 ‘소년심판’ 이후 따로 연락하진 않았는데 아마 알지 않을까 싶어요.”
이제 막 배우의 이름을 달기 시작한 김보영은 조금씩 주변의 반응을 실감하고 있다. ‘소년심판’ 이후로 공개로 전환한 인스타그램은 하루가 다르게 팔로워 수가 급증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지 싶기도 하고, 나인 걸 어떻게 아셨지 싶기도 하고 조금 많이 신기했다”며 인기에 얼떨떨해했다.
“친구들은 ‘너 아닌 것 같다. 포스터도 너 아닌 것 같고, 코랑 입은 네가 맞는데 눈이 네가 아니야’ 이러더라고요. 할머니랑 할아버지도 방에서 조용히 지인분들에게 ‘손녀가 넷플릭스에 나왔는데 얘가 조금 사납게 나왔어’라면서 홍보를 하시고요. 할머니도 홍보를 하시는구나 싶었어요.”(웃음)
사실 가장 신기한 건 롤 모델이었던 김혜수와 한 작품을 하게 된 것이다. 연기를 시작한 뒤로 꼬박꼬박 쓰고 있는 연기일지에 ‘김혜수 선생님과 같이 작품을 하고 싶다’는 염원을 적은 지 약 8개월 만에 그 꿈이 이뤄졌다. ‘진짜 이게 왜 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적 같았고, 실제로 함께 연기한 뒤로는 ‘꼭 그런 배우가 돼야겠다’는 확신이 섰다.
“김혜수 선생님에게 사인을 부탁드렸더니 차에 태워주셔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셨어요. 그때 제가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 연기일지에 선생님이랑 같이 연기하고 싶다고 적었는데 그게 지금 이루어졌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이 ‘자기는 마음만 먹으면 다 되나 보다. 마음 많이 먹으라’고 조언해 주셨어요.”
“저도 활동하다 보면 동료 배우도 생기고, 후배 배우들도 생길 텐데 김혜수 선생님처럼 도움을 많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배우로서 장수하고 싶습니다. 길게 가고 싶어요. 아직 많이 부족하니까 열심히 훈련해서 더 멋진 배우가 돼야겠다는 꿈을 꾸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