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도 원자력발전만큼 수주액이 큰 수출산업은 많지 않습니다. 한국 원전의 해외 수출이 성사된다면 무역보험공사가 적극적으로 금융 지원에 나설 계획입니다. 우리 기업들이 돈 버는 일인데 주저할 이유가 없죠. 국책 금융기관으로서 원전 산업의 해외 수주에 기여해야겠다는 입장입니다.”
이인호(사진)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은 최근 서울 종로구 무보 본사에서 진행된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동유럽이나 중동에 원전 수출이 확정될 경우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특히 원전 수주는 국가적 프로젝트인 만큼 수출입은행과 함께 총력 지원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원전 수주를 통해 해외로 진출하는 국내 기업들이 국내외 은행에서 자금을 조달할 때 무보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 보증하는 방식이다.
이 사장은 지난 2006년 산업자원부 원전사업기획단에서 원자력산업과장으로 일하며 국내외 원전 산업의 현주소를 직접 경험한 바 있다. 당시 그는 원자력 국제 표준화 사업을 추진하는 등 ‘한국형 원전의 쾌거’로 불리는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수출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한국 원전의 해외 수출은 2008년 바라카 원전 수주 이후 10년 넘게 명맥이 끊긴 상황이다. 올해 초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이 주도하는 이집트 엘다바 원전 사업에 한국수력원자력이 참여하기로 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사업 진행이 불투명해졌다. 그동안 해외 수주가 없다 보니 자연스레 국내 원전 기업들에 대한 무보의 금융 지원도 전무했다. 이 사장은 “지난 10년 넘게 해외 원전 수주 실적이 없었으니 무보도 금융 지원 경험이 없다”며 “차기 정부에서 원전 수출에 적극 나서 신규 수주가 이뤄진다면 우리도 적극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전 세계를 뒤흔든 우크라이나 사태는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
유럽 내 대표적 탈원전 국가였던 독일은 원전의 대안으로 러시아산 액화천연가스(LNG)를 택했다가 미국의 금수 조치로 에너지 위기에 부딪혔다. 같은 이유로 체코와 폴란드 등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동유럽 국가들은 원전 건립에 앞장서고 있다. 유럽연합(EU)이 녹색분류체계(택소노미)에 원전을 포함한 배경에도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원전의 장점을 활용하려는 동유럽의 적극적인 요구가 있었다.
반면 우리 정부는 지난해 12월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택소노미)에서 원전을 제외했다. 당시 한국수력원자력은 ‘K택소노미 검토 의견’에서 “원전이 녹색산업에서 제외될 경우 원전 프로젝트 재원 조달의 원천인 수출입은행과 무보 등 국내 금융기관들로부터의 재원 조달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사장은 K택소노미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피하는 대신 “EU 택소노미에 원전이 녹색산업으로 명시돼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 만큼 원전 수주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석탄 발전에 대해서는 “세계적인 탄소 중립 추세와도 맞지 않는 만큼 금융 지원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못 박았다. 이 사장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석탄발전소에 대한 금융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글로벌 국책 금융기관들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석탄양해제안안’에서 뜻을 모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석탄 발전을 다시 지원하기는 쉽지 않다”며 “국내 석탄 발전이 워낙 경쟁력이 있었던 만큼 아쉬운 점도 있지만 금융 지원 중단 기조는 유지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국내 기업들도 늘고 있다. 전기자동차 배터리의 핵심 원료인 니켈 가격이 한때 톤당 10만 달러를 넘어서자 영국 런던금속거래소(LME)는 거래를 중단하기도 했다. 이에 무보는 수급 리스크가 커진 원자재 수입에 필요한 금융 지원을 강화했다. 이 사장은 “백금과 알루미늄 등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된 원자재를 수입보험지원가능 품목으로 추가 지정하고 금융지원가능 한도도 최대 1.5배까지 우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수출 기업들의 고통도 크다. 미국과 유럽이 국제금융결제망(SWIFT) 제재를 통해 러시아의 돈줄을 조이면서 결제에 애를 먹는 기업들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 사장은 “지금의 대외 통상 여건은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시계 제로 상태”라며 “우크라이나 사태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촉발된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공급망 대란을 심화시킨 데다 유가와 원자재 가격 상승에 불을 지피면서 당장 수익성 악화와 현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수출 기업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출 기업의 가장 큰 애로 사항은 대금 결제 문제다. 최근 3주간 무보에 접수된 러시아 관련 무역 보험 사고 건수는 18건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 한 해 동안의 총발생 건수(12건)를 뛰어넘는 수치다. 특히 3월 첫째 주만 해도 4건이었던 무역 보험 사고가 이후 2주 동안만 14건이 추가될 정도로 피해 확산 속도가 빠르다. 이 사장도 “환율이 달러당 70루블에서 140루블로 2배나 치솟으면서 달러화로 계약한 바이어들이 대금 결제를 미루고 있어 국내 중소 수출 기업의 피해가 커지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이에 무보는 바이어의 대금 회수 지체 등에 따른 수출 기업의 유동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선적 전 수출신용보증’ 보증 한도를 감액 없이 기간 연장해주기로 했다. 아울러 단기 수출 보험에 가입한 수출 거래의 대금 미회수가 발생했을 경우 보험금을 1개월 이내에 신속히 지급하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비상사태에 따른 바이어 재무 상태를 점검하고 신규 바이어를 발굴해 거래선을 추가·변경할 수 있도록 국외 기업 신용조사 수수료를 5건까지 면제해주고 기업의 수출 실적이나 규모와 관계없이 수출입·법무·회계 등 1 대 1 맞춤형 컨설팅도 제공한다. 또 우크라이나 사태 전담 대응 태스크포스(TF)를 상시 가동해 사태 추이를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정부·유관기관과도 긴밀한 공조 체계를 유지할 방침이다.
이 사장은 무역보험에 미처 가입하지 못한 기업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당장 바이어가 대금을 결제하지 못하더라도 적절한 사전 조치를 취해두면 상황이 정상화된 뒤 대금 회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며 “수출거래계약서와 운송 서류 일체를 확보하고 바이어가 자신의 채무를 인정한다는 확인서를 받아둬야 한다”고 조언했다. 법적 다툼이 벌어질 경우 e메일도 법적 효력이 인정되기 때문에 바이어와 주고 받은 e메일을 잘 보관하고 계약서의 서명 날인이 바이어 측 대표자와 동일한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무보는 국내 기업의 해외 프로젝트 수주 지원에도 앞장서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저유가로 지난해 잠시 주춤했던 해외 프로젝트 수주는 올해 들어 고유가와 사회기반시설(SOC) 프로젝트 발주 증가 등에 힘입어 점차 되살아나며 지난달 말 기준 43억 달러의 수주 실적을 달성했다. 무보는 금융시장의 유동성을 프로젝트에 연결해주는 파이프라인 역할을 맡아 국내 기업들의 해외 프로젝트 수주 참여를 돕고 있다.
이를 위해 무보는 우리 기업의 수주를 전제로 발주처에 신용 한도를 제공하는 ‘발주처 금융 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 사장은 “쉽게 설명하면 한국 기업이 해외 정부나 기업의 프로젝트를 맡는다는 전제로 돈을 가져다 쓰라는 것”이라며 “발상의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발주처는 자금 조달 걱정 없이 신속히 사업을 추진할 수 있고 이는 우리 기업들이 해당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촉매제가 된다”고 강조했다. 상대 국가나 기관이 프로젝트 수주에서 중요하고 신뢰할 만한 경우 매우 유익한 정책이라는 설명이다. 무보는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 재무부와 멕시코 재무부에 각각 30억 달러와 10억 달러의 사전 신용 한도를 지원했고 이달에는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인 PIF에도 10억 달러의 한도를 제공했다.
에너지 가격 급등세가 이어지면서 무역적자 우려도 커지는 상황이다. 정부는 무역수지 회복을 위해 올 상반기에만 무역금융 100조 원을 집중 투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사장은 “우리 기업의 저력을 믿는다”고 힘줘 말했다. 그는 “우리 기업의 수출 규모나 저변을 따져봤을 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자체적인 탄력이 생겼다고 본다”며 “우리 수출 기업의 맷집이 단단해진 데다 무보를 비롯한 국책 금융기관이 필요할 때마다 지원하면 위기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He is…
△1962년 서울 △서울 광성고 △서울대 경제학과 △서울대 행정대학원 정책학 석사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행정학 석사 △1987년 행정고시 31회 △2006년 산업자원부 원자력산업과장 △2009년 미국대사관 공사참사관 △2012년 지식경제부 정책기획관 △2014년 산업통상자원부 창의산업정책관 △2015년 산업통상자원부 무역투자실장 △2016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차관보 △2017년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 △2019년~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