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치일반

[목요일 아침에] ‘한 끼 식사’의 정치

■문성진 논설위원

윤 당선인 서민적 '오찬행보' 보기 좋지만

중요한 건 진심이지 의지의 과시는 아냐

세종대왕, 토지 과세 25년이나 숙의 거쳐

'5월10일 청와대 개방' 너무 집착 말기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혼밥(혼자 밥 먹기)을 하지 않겠다”는 대선 전 약속을 잘 지켜 가고 있다. 지난 14일에는 서울 남대문시장 상인들과, 15일에는 경북 울진 산불 피해 현장 관계자들과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민생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16일에는 서울 통의동 인근에서 안철수 인수위원장 등과, 17일에는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 등과, 18일에는 이준석 대표 등 국민의힘 지도부와 오찬 자리를 가졌다. 14일부터 닷새간 하루도 빠짐없이 공개된 오찬 메뉴는 꼬리곰탕, 짬뽕, 김치찌개, 피자, 육개장 등으로 윤 당선인의 서민적 풍모를 느끼게 했다는 평이 자자하다.



중국 주나라 초기 최고 권력자 주공처럼 윤 당선인이 사람과의 만남을 이처럼 소중히 여기는 자세를 보이니 자못 기대가 크다. 역사서 ‘십팔사략’에 따르면 주공은 인재를 대하는 태도가 늘 간절하고 겸손했다. 그는 “밥을 먹다가 손님이 찾아오면 입안의 음식을 뱉어내고 손님을 맞았다. 이는 천하의 선비를 잃을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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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들도 식사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서민적인 대통령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싶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칼국수를 청와대 오찬의 단골 메뉴로 올렸을 정도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자 시절 국밥을 먹는 ‘먹방’ 광고를 찍어 서민적이고 소탈한 지도자의 모습을 심으려 했다. 하지만 칼국수와 국밥 식사를 즐겼던 두 전직 대통령이 그렇게 해서 국민들 마음속에 서민적인 지도자로 자리하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장면 전 국무총리의 도시락 식사는 되레 역풍을 초래했다. 4·19 혁명 이후 집권한 그는 이승만 전 정권의 부패·특권과 단절한 청렴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평소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하지만 민생이 파탄 난 상황에서 그 모습은 정치 쇼로 비쳐졌고 장면 정부는 ‘도시락 정권’이라는 비웃음만 받았다.

한 끼 식사, 참 중요하다. 그러나 거기에서 뭘 더 얻으려 든다면 부질없다. 중국 전국시대에 중산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중산 왕은 인재를 두루 뽑아 써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마음으로 각처의 재사들을 모아 잔치를 열었다가 외려 화근을 자초했다. 잔치에 참석한 사마자기가 음식을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앙심을 품고 훗날 인근 강대국 초나라를 부추겨 중산을 망하게 한 것이다. 이처럼 한 끼 식사가 재앙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

밥 한 끼가 그렇듯 정책 또한 과욕을 부리지 않아야 낭패가 없다. 세종대왕은 즉위와 동시에 토지 과세 체계를 손보고 싶었다. 지방 수령들에게 재량권이 과다하게 주어진 당시 제도는 부패와 불공정의 근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도 변경에 반대 의견이 많다는 점을 알고는 숙의를 거듭한 끝에 25년 만에 개혁을 완결했다. 세종의 소통 과정은 답답할 정도로 길고 지난했다. 세종 9년에 과거 시험에 해당 문제를 출제해 의견을 구하고 12년엔 20만 명가량의 백성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 다음 20년에 새 제도를 시범 실시했다. 그리고 다시 6년 뒤인 세종 26년 찬성 여론이 더 높아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을 공식적으로 시행했다. 세종은 정책이 선의라고 무턱대고 밀어붙이지 않고 설득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선의가 정책으로 고스란히 발현될 수 있게 했다. 거기에 세종대왕의 위대함이 있다.

윤 당선인은 측근들과 통의동 오찬 후 산책에서 늘 환호하는 이들을 볼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꺼려 그곳으로의 발걸음을 끊은 이들도 적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5월 10일 청와대 개방’ 역시 취지가 좋아도 반대하는 이들이 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정책의 선의만 믿고 밀어붙이다가는 탈원전 정책과 부동산 규제의 역풍을 맞은 문재인 정부의 전철을 밟게 될 수도 있다. 윤 당선인이 5년 뒤 퇴임 때는 소통과 숙의를 통해 선의의 정책을 오롯이 현실로 구현해낸 지혜로운 정치 지도자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문성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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