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랩(053800)의 주가가 창사 이래 최고가를 경신했다. 폭등의 배경에는 외국인 투자가들이 있다. 영국계 투자자문사인 JP모건 시큐리티스와 자산운용사 LGIM이 주식을 대량 사들인 데 이어 미국의 ETF운용사인 퍼스트트러스트가 지분 14%가량을 확보하며 2대 주주로 올라선 것이 확인됐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사이버 보안에 대한 경각심이 확대되자 국내 유일의 사이버 보안 기업인 안랩에 대한 비중을 확대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대주주인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의 새 정부 총리 입각설도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이 나온다. 안 위원장의 지분 18.6%가 백지 신탁 대상이 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백지 신탁으로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 해외 운용사들이 이익을 위한 실력 행사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23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안랩은 전 거래일 대비 가격제한폭(29.93%)까지 치솟은 17만 58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 2012년 1월 3일 기록한 역대 장중 최고가(16만 7200원)를 10년여 만에 갈아치웠다. 5거래일 연속 상승세로 안랩은 이 기간에만 주가가 2배(100.91%) 치솟았다. 이날 외국인이 194억 원어치를 사들이며 주가를 끌어올렸다. 외국인은 이달 14일부터 8거래일간 순매수세를 기록했다.
이에 외국인의 안랩 지분율은 28%로 늘었다. 이달 11일에는 14%대였다. 최근 미국 퍼스트트러스트가 안랩 주식 140만 주가량을 담으며 지분 14.06%를 확보해 동그라미재단(9.99%)을 밀어내고 2대 주주 자리를 꿰찼다. 주당 매입 단가를 10만원으로 추산하면 약 1400억 원어치 주식을 쓸어 담은 셈이다. 이달 18일 116만 9606주를 한번에 사들이며 시장의 관심을 모았던 외국인 계좌의 주인이 드러난 것이다. 퍼스트트러스트는 사이버 보안 관련 상장지수펀드(ETF) 중 가장 규모가 큰 ‘퍼스트 트러스트 나스닥 사이버시큐리티(티커 CIBR)’를 운용하고 있다. 이 회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CIBR ETF는 시스코·팔로알토·크라우드스트라이크 등 미국의 보안 업체에 집중 투자하고 있으며 안랩도 22일 기준 133만 9623주를 들고 있다. 해당 ETF의 순자산은 62억 달러다.
안랩에 러브콜을 보낸 것은 퍼스트트러스트뿐만이 아니다. JP모건은 이달 17일 기준으로 안랩 주식 53만 8878주(5.38%)를 단순 투자 목적으로 보유 중이라고 공시했다. 영국 자산운용사 LGIM도 이달 지분 5.13%를 매수하며 주요 주주로 올라섰다.
안랩 투자의 불쏘시개가 된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를 향해 무자비한 폭격을 퍼붓고 있지만 그 뒤편에서는 광범위한 사이버전이 전개되고 있다. 사이버 공간도 전시 상황에 돌입하면서 고도화된 사이버 보안 체계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된 것이다. 기초 체력도 좋다. 안랩은 10년간 꾸준히 성장했다. 2011년 연결 기준 약 1032억 원이던 매출은 2020년 약 1782억 원으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79억 원에서 200억 원으로 늘었다.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2072억 원, 229억 원으로 전년 대비 16.3%, 14.7%씩 늘었다. 자산운용사의 한 관계자는 “자국 사이버 보안업체를 보유한 나라들은 극히 드물다”며 “안랩의 본질적인 가치를 따졌을 때 정치주로 분류되며 오히려 저평가를 받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업황을 주가 상승의 전부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안 위원장이 국무총리 등 물망에 오른 점도 무시하기 어렵다. 안 위원장이 입각할 경우 지분을 매각 또는 백지 신탁해야 한다. 최대주주가 바뀔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에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외국인의 주식 매수가 인수합병(M&A)이나 최대주주 변경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함이라는 다양한 시나리오가 제기됐다.
전문가들은 매수 주체가 일반적인 외국계 헤지펀드와 달리 수익 목적으로 운용하는 ETF이기 때문에 경영권 공격의 목적으로 지분을 사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백지 신탁 이슈로 지배 구조 변동이 심한 걸 틈타 이사진 선임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등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는 남는다.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운용사들이 원하는 이사를 밀어붙이고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을 요구하는 등 실력 행사에 나서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며 “국내 투자 기업에도 점점 더 다양한 요구를 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