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완에게 배우로서의 사명감이란 뻔히 보이는 어려운 길을 걷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어려운 용어가 난무하고, 대사량이 어마어마했던 드라마 '트레이서'도 그랬다. 그는 결국 해내야 된다는 마음으로 임했고, 마침내 완주했다.
MBC 금토드라마 '트레이서'(극본 김현정/연출 이승영)는 누군가에겐 판검사보다 무서운 곳 국세청, 일명 '쓰레기 하치장'이라 불리는 조세 5국에 굴러온 독한 놈 황동주(임시완)의 물불 안 가리는 활약을 그린다. 황동주는 전직 대기업의 뒷돈을 관리하던 업계 최고의 회계사로 돈과 성공을 모두 얻었지만,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국세청 조사관이 돼 통쾌한 복수를 날리는 인물이다.
"대본을 처음 봤을 때 인상이 남달랐어요. 기획의도부터 대본까지 빼곡했고, 분량도 상당했죠. 외워야 되고 해야 될 게 많다는 의미잖아요. 배우로서 고생길이 훤히 보였기 때문에 '제발 재미 없어라'는 염원을 갖고 읽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웬걸요. 작가님의 글에 대한 애정과 철두철미함, 그리고 몇 년간 응축된 노력이 보이더라고요. '이걸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배우로서 사명감에 문제가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마디로 안 할 수 없었던 거예요."
황동주는 과거 아버지가 세무조사를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잘나가던 회계사 일을 그만두고 국세청으로 향한다. 복수심으로 무장한 그는 업계를 씹어먹던 실력과 특유의 뻔뻔함을 바탕으로 기성세대에게 한 방을 날린다. 임시완은 이런 황동주를 두고 "아재 잡는 핏덩이"라는 키워드를 설정한 뒤 외모부터 톤까지 신경쓰며 캐릭터를 잡아갔다.
"국세청 고위 간부면서 똑똑하고 악한 사람들이 황동주의 표적이에요. 이런 사람들과 싸울 때 너무 똑똑한 척을 하거나, 똑 부러지는 톤을 잡으면 그들의 판 속에 뛰어드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린아이들이 싸우는 걸 보면 유치해 보이는 지점이 있잖아요. 오히려 아저씨들이 쓰지 않을 법한 어조를 쓰면서 화를 돋우는 게 맞는다고 판단했죠. 그들이 말을 더 어렵게 할수록, 알아들었는데도 '모르겠는데요'라고 받아치는 게 더 효과적이에요."
"황동주를 곱슬머리로 설정했는데, '며칠 동안 감지 않아도 되는 머리'를 의도했어요. 왠지 황동주를 보면 영상이지만 냄새가 날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거든요. 수트를 쫙 빼입은 기성세대나 악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모습과 정반대로 설정한 거죠. 하고 보니 곱슬머리가 황동주의 고집을 극대화한 것 같아서 뿌듯하기도 해요."
국세청을 배경으로 삼은 드라마는 법정이나 의학 드라마에 비해 흔치 않다. 임시완은 참고 자료가 없어 국세청에 직접 방문해 직원들의 삶을 살펴봤고, 직업의 특수성이 아닌 황동주의 특수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기로 마음먹었다.
"'트레이서'가 교육용 드라마는 아니잖아요. 국세청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갖고 있지만, 누군가를 가르치는 드라마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퇴근 시간에 가볍게 맥주 한잔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즐거운 드라마일 거라고 생각하고 접근했죠. 드라마는 극적인 걸 만드니까 현실과 차이가 있기도 하고요."
임시완은 회계사 시절의 황동주와 국세청으로 들어온 황동주의 변화를 확연히 표현하려고 했다. 회계사 시절의 황동주는 정의 보다 일로 성공하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인정받은 능력 덕에 자신감이 가득 차 있고, 능글맞고 사람을 유려하게 대할 줄도 안다. 그러나 국세청에 들어온 후에는 복수에 이를 갈며 반대 양상을 보인다. 복수심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다.
복수는 카타르시스로 이어졌다. 임시완은 권선징악의 구조 속에서 거침없이 소리를 지르고 상대방에 일격을 가하면서 복수의 쾌감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특히 황동주가 집안 벽 어딘가에 돈이 숨겨져 있다는 걸 확신하고 거침없이 망치를 휘두르는 장면은 다시 봐도 통쾌할 정도라고.
"해머신과 의도적으로 회의를 난장판으로 헤집는 신이 있는데, 저도 찍으면서 굉장히 재밌었어요. 이 두 신이 제가 결정적으로 작품을 하게 된 계기라고 봐도 무방해요. 이 신에서 황동주가 특히 매력적이거든요. 감독님과 회의를 많이 하고 고민도 하면서 만들어 나갔어요. 이외에도 어른들이 위압감을 주려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할 때, 되바라지게 또박또박 반론을 제기하는 모습들도 시원했습니다."
임시완은 군 전역 후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 '런 온', '트레이서'까지 약 3년간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는 결국 번아웃까지 경험했다. "어떻게 보면 번아웃이 당연하다"는 그는 며칠 동안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면서 번아웃을 이겨내기 위해 힘썼다.
"3년간 연달아 작품을 하면서 제대로 쉰 적이 없으니까 그런 것 같아요. '트레이서'에서 제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어떻게 하면 더 위트를 넣을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촬영에 임했어요. 저도 모르게 긴장 상태가 유지된 거예요. 이제야 제대로 쉬게 되면서 긴장이 풀리고, 고민으로부터 해방이 된 게 번아웃으로 왔습니다."
2017년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으로 칸에 방문했던 그는 개봉을 앞두고 있는 '비상선언'으로 또 한 번 칸의 레드 카펫을 밟게 됐다. 두 번째 방문인 만큼, 안 보였던 게 보였고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처음 칸에 갔을 때는 드라마 때문에 정신이 없었어요. 거의 무박 3일의 일정을 소화했거든요. 돌아와 보니 기억에 남는 게 없어서 안타깝더라고요. 처음이라 긴장을 많이 해서 간 것도 있고요. '빠른 시일 내에 다시 가고 싶다'는 마음이었는데, 감사하게도 기회가 빨리 왔어요. '이번에는 눈에 많이 담고 경험도 많이 해야겠다'는 마음을 안고 칸에 갔습니다. 길거리를 걷고, 10km 달리기도 해보고 그곳의 감성에 젖으려고 노력했어요. 여전히 좋더라고요. 정서가 맞닿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 오롯이 연기로 인정받고, 박수받은 경험은 짜릿했고요."
'비상선언'은 올해 초 개봉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여파로 개봉이 무기한 연기됐다. 임시완은 이외에도 영화 '보스턴 1947'과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의 개봉도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19 시국에서 기약 없는 기다림은 그에게 고통이었다.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인에 제 영화 3개가 누적돼 있어요. 호평이든 혹평이든 피드백을 받는 과정이 있어야 성장하는데, 그런 게 없이 계속 찍기만 하니까 아쉬움이 커요. 이제는 작품을 찍은 지 오래돼서 인터뷰를 다시 하려면 공부를 해야 될 판이에요. 얼른 개봉도 수월하게 되고, 영화관 시장도 활성화됐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