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텔, 마이크론, 아날로그디바이스(ADI) 등 핵심 반도체 기업들이 ‘반도체 동맹’ 결성에 나섰다. 중국을 강하게 견제하는 한편 한국 등 아시아 국가에 추월당한 ‘반도체 제국’의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
8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마이터 인제뉴이티(MITRE Engenuity)’가 주도해 설립한 미국 반도체 동맹에 인텔과 마이크론·ADI가 합류했다. 반도체 동맹에 합류한 기업들은 견고한 미국 반도체 산업을 구축하기 위해 반도체 연구개발(R&D) 및 프로토타입 제작 등 다방면에서 협력하기로 원칙을 세웠다.
인텔은 삼성전자와 반도체 시장 1위를 놓고 경쟁하는 대표적인 미국 반도체 기업으로, 로직반도체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마이크론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이어 글로벌 D램 점유율 3위를 차지하고 있는 메모리 시장의 핵심 업체다. 아날로그반도체 제조 기업인 ADI는 두 회사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전기차 등 여러 분야에서 수요가 늘며 주목받고 있다.
반도체 동맹의 목표는 분명하다. 글로벌 첨단 기술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의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강화해 미국 전체의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앤 켈러허 인텔 기술개발 담당 수석부사장은 “미국 반도체 업계의 리더십을 재구축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기술 패권을 놓고 경쟁 중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동맹은 이번에 참여한 업체들뿐 아니라 미국 내 반도체 제조 업체, 소재·장비 업체, 학계, 전문가 그룹 등 포괄적인 반도체 산업 관계자들을 끌어들여 몸집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업계에서는 미국이 자국 내 반도체 제조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민간을 중심으로 ‘힘 합치기’를 시작했지만 결국은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과의 공동 행보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예상하고 있다. 반도체 공급망이 전 세계에 고루 분산돼 있는 데다 반도체 패권을 쥐기 위한 최대 과제인 ‘중국 견제’를 위해서는 우호 국가와 힘을 합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조 바이든 미국 정부가 한국·일본·대만에 ‘칩4 동맹’을 제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혁신을 미국 이익으로'…힘 모은 美 반도체 기업들=미국 ‘반도체 동맹’은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최대 화두인 ‘공급망 문제’를 풀기에 앞서 하락한 미국 기업들의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한때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며 경쟁력을 높였지만 메모리 반도체는 한국에, 파운드리 시장은 대만에 밀리는 등 예전만 못한 상황이다. 인텔이 로직메모리 분야에서 여전히 월등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만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자율주행 등 새로운 첨단 기술 환경으로 시장이 변모하면서 성장이 다소 정체된 상태다.
반도체 시장은 2021년 5526억 달러, 2022년 6169억 달러, 2030년 1조 3510억 달러 등 급격히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업계 특성상 한 번 기술력에서 뒤처지면 성장한 시장의 과실을 누리기는커녕 생존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하다.
‘반도체 동맹’이 결성에 앞서 지난해 11월 발표한 ‘미국의 성장을 위한 미국의 혁신’ 선언문에 이름을 올린 업계 전문가들의 면모를 보면 이 같은 위기의식은 더욱 짙게 드러난다. 기업 단위의 참여는 이들 세 회사지만 개인 자격으로 퀄컴과 램리서치·AMD·마이크로소프트 등 다수 기업의 관계자들이 이름을 올렸다. 한때 업계를 주도했던 미국 기업들이 다시 글로벌 시장의 주도권을 되찾아오겠다는 강한 의지가 널리 확산해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국가 중심의 동맹 체제로 인해 다른 글로벌 기업들의 견제를 촉발할 수도 있지만, 미국 기업들이 힘을 합쳐 대응해 기술 경쟁력 확보와 공급망 협상 과정에서의 협상력을 높이는 편이 이익이라는 판단이다. 반도체 동맹 측은 “우리의 핵심 목표는 미국의 혁신이 미국의 성장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명확한 취지를 설명했다.
◇美 정부는 협력 강화 초점…기초체력 다져 '칩4'로 향한다=‘반도체 동맹’은 민간 기업 중심인 만큼 이익 추구에 활동이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얼핏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비롯한 국내 기업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하지만 미국이 중국의 견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국제 역학 관계와 전 세계로 분업화된 반도체 시장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결국 우호국들을 결집해 ‘원팀’을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관측이 힘을 얻는다.
최근 조 바이든 미 정부가 주요 반도체 기업을 비롯해 한국·일본·대만 등 반도체 시장 주요 국가에 ‘칩4(Chip 4)’ 동맹을 제안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해당 국가 간 공급망 교류는 강화하되 중국은 여기서 최대한 배제해 경쟁력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계산이다. 중국은 지난해에만 28건의 반도체 공장 신설 프로젝트를 발표했을 뿐 아니라 이미 260억 달러(약 32조 2140억 원)를 투자하는 등 반도체 시장 주도권 잡기에 사활을 걸고 있는 중이다. 미국은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안보 측면에서도 중국을 최대한 견제해야 하는 입장이다.
문제는 ‘칩4’ 국가끼리 협력해 중국의 ‘굴기’를 꺾더라도 이 자체만으로 미국의 반도체 시장 지배력이 향상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미 정부의 ‘칩4’ 제안 이면에는 미국 민간 기업들이 별도로 힘을 합쳐 경쟁력을 높이는 투트랙 방식이 필수적이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미국 정부는 520억 달러의 보조금 지원 대상을 자국 내 기업으로 할지, 미국 내 제조 공장을 둔 외국 기업까지 포함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자국 경쟁력 강화에 방점을 둔다면 전자에, 칩4 동맹 현실화를 바탕으로 글로벌 공급망에서 주도권을 쥐려면 후자로 향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결정이다.
◇국내 기업 피해 크지 않을 듯…"결국 공존 향할 것"=‘반도체 동맹’ 소속 기업들도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다. 인텔의 경우 반도체 동맹을 통해 미국 중심의 사업 추진을 천명했지만 한편으로는 유럽에 110조 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하고 협업 강화에 나섰다. 마이크론은 일본에 8조 원을 투자해 D램 공장을 짓기로 했다. 반대로 삼성전자는 미국에 대규모 첨단 반도체 팹을 건설하는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일방적인 견제보다는 국가를 초월한 협력에 방점을 두고 있는 모습이다.
이 같은 이유로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도 결국 이번 미국 ‘반도체 동맹’은 역설적으로 글로벌 공급망을 더욱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흐를 것으로 예상하는 분위기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 업체 입장에서는 제조 분야 경쟁력이 뒤처지면서 이를 타개하고 싶은 욕구가 강할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결국 반도체 생태계가 커지려면 다양한 글로벌 업체가 모여 협력해야 한다. 지금은 경쟁에 방점이 찍혀 있지만 결국 협력을 바탕으로 공존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