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에디터는 좀 감동적인 경험을 했어요. 동물성 식재료 없이 섬세하고 깊은 맛을 내는 레스토랑을 방문했거든요. 7가지 요리에 7가지 내추럴 와인을 맞춘 페어링 코스에서 신세계를 영접했달까…아마 비건(지향인)이라면 이름 아는 분들 많을 거예요. 안백린 셰프님과 변혜정 소믈리에님이 이끄는 서울 서초동 천년식향(인스타).
깊고 풍부한 맛, 발효의 힘
오후의 여리여리한 햇살이 비치는 테이블에 도착한 첫 요리는 비트로 만든 애피타이저(아래 사진). 저온조리한 비트의 쫄깃한 식감이 신기했어요. 효모 추출물을 넣어서 감칠맛이 났구요. 여기에 캐슈넛을 발효해 만든 블루치즈(톡 쏘는 그 냄새가 정말 동물성 블루치즈 같았던)와 아몬드로 만든 리코타치즈를 곁들였어요. 비트와 치즈는 직접 만든 흙마늘 크래커 위에 담아 주셨는데, 치즈 맛+구운 마늘 맛+바삭한 크래커가 합쳐지니까 저세상 풍미가 나더라고요. 요리 위에 장식한 딜(허브의 한 종류)과 라일락꽃 덕분에 보는 맛도 쏠쏠했고요. 자연재배한 식물들을 곧장 데려와서 요리로 내놓는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이 실현되는 자리였어요.
두번째 접시는 아티초크&아스파라거스. 코코넛 등의 재료로 직접 만든 발효버터로 조리한 덕에 아스파라거스와 아티초크가 더 깊은 맛을 내줬어요. 한국에서 보기 힘든 아티초크도 반가웠고요.
미국에서 날아온 식물성 연어
다음 메뉴인 연어초밥은 미국 대체식품 기업인 커런트푸즈(인스타)가 해조류로 만든 식물성 연어를 셰프님이 소량 수입해서 만드셨는데, 이게 진짜 인상적이었어요. 처음 먹어보는 미쿡 식물성 연어는 원래의 연어보다 조금 기름기가 적다 싶을뿐 모양도 맛도 싱크로율 95%!!
연어도 놀라웠는데 연어 아래의 샤리(밥)가…직접 만드신 누룩 소금으로 한국인의 심금을 울리는 밥맛이더라고요. 한 20개는 쉬지 않고 집어먹을 수 있는 맛이었어요.
다음으로는 5시간 저온조리해서 쫄깃한 버섯과 트러플오일, 흑마늘로 맛과 색을 낸 블랙 파스타가 이어졌어요. 블랙파스타는 정말 고소한 흑마늘 발효 소스와 선명한 맛의 바질, 드라이토마토가 입에 착착 붙어서 적은 양이 아쉬울 정도.
그리고 대망의 디저트. 튀긴 라이스페이퍼, 우전 녹차와 라벤더를 우려 만든 아이스크림, 슈가파우더의 섬세한 플레이팅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어요. 슬슬 저녁으로 접어드는 오후 6시의 햇빛이 접시에 내려앉자 유럽의 어느 유적지라든가 아름다운 정원 같은 이미지(진부함 죄송)가 떠올랐어요.
맛은 요즘 말로 ‘말해모해’. 곁들여 나온 피스타치오·산딸기에다 비파(에디터는 처음 먹어봤어요)까지, 정말 제대로 대접받는단 느낌이 오더라고요.
7종류의 페어링 와인에 대해서도 하루종일 써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안백린 셰프님의 모친이시기도 한 변혜정 소믈리에님(와인수입사 엠버앤처빌 현 CEO, 전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 등 눈부신 커리어의 보유자)이 직접 고르고 수입한 내추럴 와인들인데 요리에 맞춰 활기찬 패션프루트향, 잘 익은 사과와 배의 냄새, 화사한 꽃향기 등등의 향연이 이어졌죠. 한 잔 한 잔 따라주실 때마다 설명을 듣는 재미, 설레어하며 와인의 향을 맡고 맛보는 즐거움도 컸고요.
맛의 경험치를 높이고 싶다면
천년식향은 정말 얘깃거리가 많은 곳이에요. 안백린 셰프님이 직접 하신 인테리어(여러모로 능력자 인증하시는..)에, 말문을 여실 때마다 느껴지는 열정, 좋은 재료와 와인을 위해 여러 나라를 탐방하는 에너지까지. 뚜렷한 지향점을 향해 조용히, 하지만 전속력으로 달리고 계신다는 느낌이었어요.
흥미로운 지점은, 안 셰프님 본인도 비건지향이고 천년식향의 모든 식재료가 식물성인데도 언제나 "비건 레스토랑이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하세요. 인스타에도 '비건 표방 X'라고 적어두셨고요. 여쭤봤더니 "식물성 재료는 제 요리의 한 부분일뿐, 비건 요리로 규정되기보단 다양한 발효 요리를 재해석하는 셰프로 불리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비건 입장에선 조금 서운할 수 있겠지만, 판단은 용사님들의 몫이지만, 에디터는 대체로 수긍하게 되더라고요.
천년식향의 단점은 적은 양과 비싼 가격. 금~일요일에는 단품 주문도 가능하지만 월~목요일에는 와인 1병 이상 주문, 최소주문금액 등의 조건이 있어서 상당히 비싼 편이에요. 하지만 아직 비싼 식물성 재료와 발효 음식을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과 시간이 들어간 가격이에요. 안 셰프님은 소스 하나도 사서 쓰는 법이 없거든요. 익숙한 식재료의 새롭고 깊은 맛, 발효 음식의 깊이, 요리와 와인의 찰떡같은 페어링 같은 경험을 원하는 용사님이라면 도전해보시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