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의 습성과 취향은 참 신기해요. 이것도 인간 중심적인 시각이긴 하지만요. 돼지는 진흙 목욕을 좋아하고, 염소는 미네랄과 염분을 핥기 위해 절벽을 타고 오르기도 하고요. 라쿤은 손을 정말 잘 써요.
하지만 이런 모습을 우리는 잘 몰라요. 소나 돼지나 닭은 대부분 갑갑한 농장에서 살다가 도살된 다음 식탁에 오른 채로 사람과 만나게 되고, 그 외의 동물들은 대부분 동물원에서 무기력한 모습으로 사람과 만나죠. 동물들과 제대로 만날 기회가 없다는 건, 그들이 갖가지 감정을 다양한 행동과 방식으로 표출한다는 사실을 점점 잊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화난 미니피그 ‘릴리’ 달래기
레터 시작부터 감상(?)에 젖어 주절대는 이유는 얼마 전 동물권행동 카라에서 운영하는 ‘미니 팜 생추어리’에 다녀왔기 때문이에요. 에디터가 찾아간 날은 성격 좋기로 소문난 미니피그 ‘릴리’의 심기가 왠지 불편했어요. 이름은 미니미니하지만 덩치는 대형견에 가까운 녀석이죠. 낯선 에디터 때문에 기분이 나쁜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날 새벽부터 소위 ‘꼬라지’를 부렸다고 하더라고요. 보호소 펜스를 괴력으로 뚫고 나오고, 간식용 쌀포대를 엎어서 와구와구 먹고, 놀이용 흙주머니를 물어뜯기도 하고요.
다행히 활동가님들의 능숙한 달래기와 간식 공급 덕분에 릴리의 화는 가라앉았어요. 진흙 목욕도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돼지는 땀샘이 없어서 진흙 목욕으로 체온을 조절하는 습성이 있대요. 덴마크에선 자국 돼지농장에 무조건 진흙 목욕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도록 법으로 정해놨을 정도예요.
기분이 좋지 않은 릴리의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어요. 화난 돼지를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구나, 하고요. 돼지도 즐거울 때, 화날 때, 슬플 때가 있는데 그걸 여지껏 모르고 산 셈이에요. 농장에서 사육당하는 돼지들에겐 감정을 표현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니까요.
라쿤 ‘로켓’은 우릴 보고 웃지
반면 다른 한 켠에서 혼자 지내는 라쿤, ‘로켓’은 마냥 신났어요. 이날 활동가님들이 시원하게 목욕할 수 있는 커다란 고무 다라이(표준어 ‘대야’는 그 느낌 아니니까요)를 사왔거든요.
로켓은 2019년 공원에 유기됐는데 다행히 카라에서 구조했어요. 원래는 서울 서교동 카라 더불어숨센터 옥탑방에서 살다가, 미니팜생추어리가 생기면서 이사를 왔죠. 터널, 사다리 같은 다양한 구조물과 흙바닥이 있어서 로켓도 숨통이 트였을 거예요.
몇 시간 지켜본 것뿐이긴 했지만 로켓은 상당히 똑똑한 녀석이었어요. 새로운 도구에 심취해 이리저리 만져보기도 하고, 친한 활동가님을 이리저리 약올리기도 하고 말예요.
그리고 손을 너무너무 잘 쓰더라고요. 원하는 걸 낚아챈다거나, 일부러 숨겨둔 간식을 찾아낼 때요. 그래서 더 귀여웠어요.
하지만 로켓을 오랫동안 봐 온 고현선 활동가님은 이렇게 딱 잘라 말하셨어요. “라쿤은 애초에 가정에서 키우기 적합하지 않은 동물”이라고요. 야생성이 강하고, 사람이 ‘길들인다’고 해서 순순히 따르는 녀석들이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우리나라 법에는 이런 라쿤을 반려동물로 키우면 안 된다는 규정이 없어요. 귀여운 모습에 반해서 키우다가 사람의 입장에서 ‘말썽을 피우니까’ 버리기도 하고요. 로켓이 버림받았던 것처럼요.
농장 동물들의 행복은 어디에
미니팜생추어리의 또 다른 공간에선 흑염소들이랑 칠면조, 사향오리, 닭(모두 예쁜 이름들이 있는데 못 외웠어요)도 만나볼 수 있었어요. 언제 도살될지 모르는 농장에서 탈출했다는 걸 아는지 정말 편안한 모습들. 맥가이버 같은 활동가님들이 흑염소들의 미네랄 섭취를 위한 블록(벽돌같이 생겼어요!)을 준비해주고, 흑염소들이 솔잎을 먹어치우고 남은 소나무 가지를 치워주고, 털갈이하느라 빠진 털을 빗질해줬어요.
염소들도 카라가 개 도살장에서 구조한 녀석들인데요. 염소들의 출신지를 찾아보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어요. 이런 농장 동물들은 농장주가 직접 중성화수술을 할 수 있대요. 수의사를 부를 수도 있겠지만, 돈을 아끼려고 농장주가 직접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마취도 없이 수컷 염소들을 거세하는 경우가 대부분.
축산업의 잔인함에 대해서 이제 꽤 안다고 생각했는데...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또 배우게 됐네요.
미니팜생추어리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사랑스러웠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곳에 오지 못한 수많은 농장 동물들이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지능이 75~85 정도(개보다 높아요)나 돼서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아는 돼지들, 사람과는 맞지 않는데도 억지로 키워지다 종종 버려지는 ‘이색 반려동물’들(희귀반려동물박람회란 행사도 있더라고요...), 열악한 농장에서 평생 고통받는 소와 닭도요.
그래서 결국은 다시 비거니즘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어요. 동물을 착취하지 않으려는 노력들에 대해서요. 당장 전세계의 모든 축산 농가를 없앨 수는 없겠지만 차근차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공장식 축산을 없애기 위한 카라의 서명 페이지 링크 두고 갈게요. 좁은 철창 안에 갇힌 녀석들부터 차례차례 구해봐요!